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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새벽의 약속 / 정아은

등록 2015-09-18 19:04

큰맘 먹고 구입한 신간을 맛있게 읽고 있는데 작은아이가 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읽던 책을 허겁지겁 책상 밑으로 감추었다. 엄마, 뭐 하고 있었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내 모습에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감췄던 책을 도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으응, 책 읽고 있었어.

어릴 때부터 나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어디에 데려가도 책만 있으면 조용해지는 아이’라고 칭찬하셨다. 그런 부모님의 태도는 내가 중학생이 된 순간부터 돌변했다. 딸이 책을 손에 잡을 때마다, 쓸데없이 소설책 같은 거 읽지 말고 그 시간에 교과서나 한 번 더 보라는 말을 매섭게 날리셨다. 그러나 당신들은 늘 ‘쓸데없는(=교과서가 아닌) 책’을 손에 들고 계셨고, 언제나 부모의 말보다 부모의 행동을 따라가게 되는 ‘자식의 법칙’에 따라 나는 몰래몰래 열심히 책을 보았다.

나의 이런 행각은 어느 날 소리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 아버지에게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혹여 구겨질까 책장도 벌벌 떨면서 넘길 정도로 아꼈던 <빨강머리 앤> 전집과 파름문고 시리즈가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광경을 두 눈 뜨고 지켜보아야 했다. 한 푼 한 푼 용돈을 모아 샀던 책들을 뺏기면서 느꼈던 억울함과 분노를, 나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물론 그 이후로 나는 ‘부모가 금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너무나 사랑하게 되는’ 아이들 특유의 법칙에 따라 이전보다 백배는 더 책을 탐하는 아이가 되어 학교 성적이 급전직하하는 비운을 맛보았다.

이때 형성된 ‘독서에 대한 죄책감’은 작가 소리를 듣게 된 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이 나의 ‘일’이 되었는데도, 혼자 방에서 책을 읽다가 누가 들어오면 후다닥 감추는 일이 종종 생겼던 것이다. 이처럼 어린 시절에 부모와 나누었던 대화, 습속, 분위기가 한 사람의 내면에 평생 남게 되는 현상을 소설가 로맹 가리는 ‘새벽의 약속’이라 칭했다.

정아은 소설가
정아은 소설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른’이 된 이후로 부모님이 내게 왜 그렇게 하셨는지 십분 이해하게 되었고, 나처럼 부모 복이 많은 경우도 드물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내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이처럼 유감스러운 장면들뿐이다. 자꾸 그런 기억만 되살리는 내가 너무 못된 건가 싶어 주위에 물어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에게 ‘당했던’ 경우를 주로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은 기억은 대개가 일상적이고 유감스러운 기억은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일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문득 두려워진다. 내가 버둥거리며 키우고 있는 내 아이들. 그들은 나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가게 될까. 내 언행 하나하나가 아이들에게 신화이자 원형이자 트라우마가 될 거란 생각을 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억울하기도 하다. 가끔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그때 빼곤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삼십년 후 아이들이 떠올릴 내 모습을 상상하며 미리 부르르 떨다가, 나는 이내 마음을 가라앉힌다. 인간인데 실수를 어찌 피해 가겠는가. 아이들은 나의 실수만 골라 기억하겠지만, 결국 인생과 깊숙이 만나면서 부모를 이해하고 연민하게 될 것이다. 그거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조용히 염원한다. 얼른 자라나 어른이 되길. 나와 맥주잔을 부딪치며 엄마도 유한한 인간이라는 걸 알고 가엾게 여기게 되었다 말해주길. 제 부모에 대한 기억과 자식에 대한 예감성 두려움으로 벌벌 떨며 자판을 두드리던 오늘의 나를 따뜻하게 회고해주길.

정아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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