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자동차 사랑은 익히 알려진 얘기다. 1933년 권력을 손에 쥐자마자 아우토반(고속도로) 건설부터 밀어붙였을 정도다. 고속도로 위를 내달릴 자동차가 얼마 되지도 않을 때였다. 전쟁을 염두에 둔 사전 준비작업 성격도 없진 않겠으나, 그가 유독 자동차에 집착한 정황은 꽤 많다. 자동차보다 한 세기 남짓 앞선 철도가 근대 문명, 곧 영국발 산업화의 상징이라면, 히틀러는 자동차를 소비 패러다임 중심의 후발 산업화 시대를 특징짓는 열쇳말로 해석했다. (어찌 보면 한국의 경험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첫 삽을 뜬 1968년 2월 당시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는 10만대를 한참 밑돌았다.)
디자이너 페르디난트 포르셰가 주도한 새로운 모델 개발 프로젝트는 이런 배경에서 시작됐다. 1930년대 초반만 해도 독일 자동차 산업 판도는 일부 고급 브랜드 위주였다. 히틀러가 내린 지침은 명쾌했다. 성인 2명과 자녀 3명을 태우고도 시속 100㎞로 달릴 수 있어야 하며, 가격은 1000라이히스마르크(RM)를 넘지 말 것. 당시 주당 평균임금이 32라이히스마르크였으니 대략 7개월치 급여와 맞먹는 금액이다. 히틀러 정권은 ‘매주 5RM으로 내 차를!’이란 표어를 내걸고, 노동자들의 주급에서 해당 금액을 떼어내 ‘강제저축’ 시키기도 했다. 마치 ‘노동자들도 내 차를 소유해야 한다’고 외쳤던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의 독일식 복사판에 가깝다. 다른 점을 꼽자면, 처음부터 대중의 욕망(소비) 충족과 자발적 동원·지지를 서로 맞바꾸려는 독재권력의 야심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인민차’(폴크스바겐)라는 이름부터가 매우 노골적이다.
폴크스바겐 프로젝트의 최초 모델명이 ‘기쁨을 통한 힘’(KdF)이었던 것도 꽤나 시사적이다. 힘(Kraft)이란 단어는 여러 갈래의 의미를 지닌다. 철강·화학·석유·자동차 등 중후장대형 신산업이 팽창하던 그 시절 힘이란 곧 에너지였다. 엔지니어 루돌프 디젤이 개발한 디젤엔진도 에너지 효율(연비) 극대화가 시대정신이던 때의 산물이다. 힘이란 특히 자동차 자체를 뜻하기도 했다. ‘말 없는 마차’를 만들겠다던 포드의 소망처럼, ‘스스로 움직이는(automobile) 기계’, 곧 자동차에서 힘의 가치가 극대화할 수 있어서였다. 마지막으로 힘이란 응당 권력의 표상이다. 말하자면, 폴크스바겐은 태생부터 에너지-자동차-권력의 이미지가 겹겹이 포개진 직조물이었던 셈이다.
폴크스바겐 78년 역사에 오롯이 새겨진 흔적들은 오늘날 폴크스바겐이란 이름이 왜 독일 사회에서 단순히 하나의 회사(브랜드) 그 이상인지를 일깨워준다. 나치즘의 오욕에도, 라인강의 기적의 영광에도 폴크스바겐이란 이름은 예외 없이 한자리를 꿰차고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는 폴크스바겐 사기극이 ‘하드웨어의 나라’ 독일 사회 전반에 끼칠 파장은 가늠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엔진 성능과 관련된 사안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오늘날 자동차에서 내연기관이 차지하는 의미는 예전보다 눈에 띄게 줄어든 편이다. 자동차 자체가 ‘말 없는 마차’에서 ‘움직이는 컴퓨터’로 탈바꿈하는 시대엔 동력(힘)보다는 첨단 정보통신(IT) 기술이 뒷받침하는 부가기능과 서비스 쪽으로 자연스레 무게중심이 옮겨가기 마련이다.
‘힘’으로 세상에 태어나 세계 1위 자리에 오른 폴크스바겐이 정작 ‘힘’의 덫에 걸려 휘청대는 형국이다. 100년 전 하루아침에 노동자들의 일당을 5달러로 두 배 올린 1위 업체 포드의 행보가 결과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연 출발점이 되었듯이, 2015년 1위 업체 폴크스바겐을 덮친 대위기는 자동차 산업을 포함한 제조업을 통틀어 새로운 변곡점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훗날 기록될까?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최우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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