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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시장통 고깃집 밑 대학 / 정아은

등록 2015-10-16 19:03

뒤늦게 관심이 생겨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유명한 철학서 몇 권을 사서 읽는데, 뜻은 모르면서 글자만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차 저작을 먼저 읽으면 좀 나을까 싶어 이 책 저 책 기웃거리다가, 철학과가 있는 대학 검색에 들어갔다. 아이 둘을 키우는 신분이라 시간이나 금전상의 제약이 많은 나는 입학 조건에서부터 등록금 액수, 커리큘럼, 교수진, 졸업 요건 등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검색을 시작한 지 삼십분도 지나지 않아 대학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백만원이 넘어가는 등록금과 까다로운 입학 조건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내 등을 떠민 것은 정해진 ‘영어전용 강의’를 필수로 이수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재학 기간에 토플이나 토익 시험을 쳐서 일정 점수 이상을 넘어야 졸업이 가능하다는 조건도 확인사살하듯 따라붙었다. 경영학을 변형시킨 취업 대비 강의를 필수과목으로 넣어놓은 대학도 있었다. 영어와 취업 대비 강의를 들어야만 철학을 배울 수 있다니. 나는 깨끗이 대학을 잊기로 했다.

다시 독학의 세계로 돌아가 읽어도 읽어도 가 닿을 수 없는 철학책을 붙들고 혼자 끙끙거리던 어느 날, 혹시나 싶어 붙잡고 있던 철학책 저자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그 이름으로 개설된 강좌 몇 개가 화면에 주르륵 펼쳐졌다. 우와. 나는 입을 벌린 채 나열된 항목들을 다급하게 클릭했다. 있었구나!

그렇게 찾은 강좌는 서울 남산 자락의 어느 시장통 고깃집 밑에서 열리고 있었다. 함께 밥을 해 먹고 함께 공부한다는 ‘연구공동체’가 마련한 강좌였다. 토요일 오후, 마을버스를 타고 언덕을 굽이굽이 돌아 들어가야 나오는 그곳을 겨우 찾아갔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책이 잔뜩 꽂힌 낡은 책꽂이와 엉킨 전깃줄이 풍경의 윗부분을 가차없이 가로지르는 창문, 허름한 찬장에 빼곡히 박힌 머그컵과 차통들, 각기 다른 모양의 책상과 의자들이 널려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곳에서 수업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가로로 넓은 그 어수선한 공간 외에 다른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정아은 소설가
정아은 소설가
멍하니 서서 그 공간을 보고 있는데, 수강생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자리를 채우자 커다란 여행용 가방의 바퀴 소리와 함께 동그란 안경을 쓴 사십대 남자 강사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열린 창문으로 오토바이 소리, 아이들 뛰노는 소리, 채소 장수의 확성기 소리가 흘러들어왔지만 강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강의를 이어나갔고, 수강생들은 잡아먹을 듯 강사를 쳐다보며 강사가 분출하는 지적 덩어리들을 덥석덥석 받아먹었다. 나는 창밖에서 몸을 흔드는 플라타너스 이파리와 열변을 토하는 강사의 옆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내 ‘학우’가 될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를 틀어올린 사십대 여자, 머리가 얼마 남지 않은 양복차림의 중년남자, 완전한 백발을 예쁘게 말아넣은 단발머리 여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앳된 청년. 그들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면서, 나는 알았다. 고급스럽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이 공간, 근래 들어 보았던 공간 중 가장 정돈되지 않은 이 공간이 다른 어느 곳보다도 학습적인 곳임을. 몇백만원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대학이 아닌 바로 이 공간이 나의 뇌와 영혼에 뜨거운 흔적을 남길 것임을.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이들, 졸업장이나 학점이나 취업이 아닌 오로지 공부에만 관심을 갖고 달려온 이들이 공간보다 더한 열기로 나를 싸고돌 것임을.

정아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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