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시론] 북한 교과서만 봐도 바로 안다 / 윤성주

등록 2015-10-21 18:31수정 2015-10-21 21:22

필자에게 한국·외국인 졸업생들의 연구실 방문이나 전자우편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일고 있는 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 때문이다. 태평양 너머에서도 이번 사태를 보는 심정은 딱하고도 답답하다. 같은 대학 동료 미국 교수들과 이 주제로 토론하기조차 민망하다. 21세기에 역사학과 역사교육이 대한민국 땅에서는 선거용 도구로 전락할 지경에 처했으니 말이다.

최근 하버드대학 역사학과의 몇몇 교수들과 환담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견해를 접할 수 있었다. 한 교수는 일본 정부가 일본사 교과서를 임의로 고치려고 출판사에 압력을 넣은 사례를 상기시켰다. 또 다른 동료는 북한을 명나라 시대에, 남한을 청나라에 비유하기도 했다. 북한 정권의 장성택 처형 사태를 14세기 말 명나라 궁정에서 발생한 일련의 학살극에, 또 남한 뉴라이트 그룹의 역사 새로 쓰기 운동을 18세기 초 이민족 정권으로 정통성 도전에 직면했던 청나라에 빗댄 것이다. 청나라는 만주족 정복집단과 전향한 하층 성리학자가 공동집필한 이념책자를 정부 주도로 학인층 전반에 유포했다.

권력으로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속사람은 그대로인 채 몸만 커버린 어린아이와 같아 보인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말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자신의 특수한 심정을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이웃 젊은이들이나 가족 구성원들에게 걸핏하면 화를 냈다. 현실 속 주인공들은 생뚱맞게도 미래세대의 역사교육을 트집잡아 역사학자들과 역사교사들에게 마구잡이식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식민지-냉전 질서가 끝난 거역할 수 없는 세계사의 흐름이 한반도에 밀려오는 현실 앞에서 당신들이 살아낸 ‘역사’가 제대로 자리매김되지 않고 있다고 느껴서일까. 독특한 ‘집단 피해의식’을 학생들 머릿속에 억지로 복제하려 애쓰다 보니 주장의 내용과 적용 방식에 몰상식과 엄청난 무리가 따른다.

미국의 역사교육 현장에서 가르치면서 학부생들은 물론 대학 순례차 청강을 하는 고등학생들이 매우 수준 높은 역사교육을 받고 있음을 느낀다. 필자의 동아시아 냉전사를 수강한 대학 1학년 학생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이 저지른 밀라이 학살에 대한 역사학계의 심도 깊은 논쟁을 매우 조리있게 소개했다. 그 학생이 명문 사립학교를 다니면서 토론식 수업 준비를 익힌 것이라 짐작했으나, 알고 보니 공립고등학교 출신이었다.

미국의 역사교육 현장에서도 공공기억과 문화적 시민권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남북전쟁이나 베트남전에 대한 해석 문제를 놓고 여전히 논쟁이 지속되지만, 연방정부는 물론이고 주정부가 여러가지 해석의 갈래를 강압적으로 통일하려는 경우는 없다. 지역교육위원회와 각 공립학교의 교사·학부모협의회가 자율적으로 역사교재를 채택하며, 사립학교의 경우 교과서가 아예 없는 경우도 많다.

폭력은 현대사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다. 특히 식민지 지배와 냉전 질서 아래 진행된 개발독재는 반드시 일상화된 구조적 폭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해석의 갈래가 어떠하든, 폭력이라는 핵심 주제를 애써 무시하고 식민사나 냉전사를 기술하면 ‘반쪽 진실’이 된다.

윤성주 미국 칼턴대학 역사학과 부교수
윤성주 미국 칼턴대학 역사학과 부교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핵심은 ‘좌-우’ 또는 ‘친일-친공’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충돌이다. 국정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의 흐름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불쌍한 사람이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이가 한 나라의 권력을 쥔 지도자가 되고 미래세대의 역사교육을 책임지겠다고 나서면 잘 타일러 말려야 한다. 자기만의 ‘불쌍한’ 심성을 ‘통합된 사관’이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우격다짐으로 주입하는 행위는 시민사회에 엄청난 불행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히로히토나 스탈린, 히틀러를 들먹일 것도 없이, 북한의 국정교과서가 단적인 예다.

윤성주 미국 칼턴대학 역사학과 부교수

▶ 북한 교과서만 봐도 바로 안다 전문보기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귀족부인 앞에 무릎 꿇은 사법 1.

귀족부인 앞에 무릎 꿇은 사법

필리핀 가사관리사, 글로벌 돌봄 체인의 비극 [똑똑! 한국사회] 2.

필리핀 가사관리사, 글로벌 돌봄 체인의 비극 [똑똑! 한국사회]

한동훈 독대 요청에 “상황 보자”…윤 대통령은 왜 ‘떨떠름’ 할까 3.

한동훈 독대 요청에 “상황 보자”…윤 대통령은 왜 ‘떨떠름’ 할까

나는 10년차 베테랑 환경미화원이다 [6411의 목소리] 4.

나는 10년차 베테랑 환경미화원이다 [6411의 목소리]

[사설] 금투세, 더이상 유예 말고 예정대로 내년 시행해야 5.

[사설] 금투세, 더이상 유예 말고 예정대로 내년 시행해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