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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나무의 인생 사람의 인생 / 이순원

등록 2015-10-23 18:25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집 뒤란에 커다란 밤나무 한 그루가 이 집안의 어떤 상징처럼 서 있다. 지금으로부터 105년 전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다. 할아버지는 밤나무 외에도 평생 참으로 많은 나무를 심었다. 가을마다 집 안팎으로 수백 접의 감이 열리고, 자두나무와 앵두나무와 석류나무가 시골집의 울타리를 대신했다.

할아버지는 열세 살에 결혼했다. 할머니는 한 살 어린 열두 살이었다. 어린 신랑과 신부는 함께 산에서 밤 다섯 말을 주웠다. 겨우내 식량이 부족한데도 밤을 팔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이듬해 봄 민둥산에 심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던 해였다.

고향집 민둥산에 밤을 심은 어린 신랑과 어린 신부가 없었다면 밤나무로 울창한 숲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백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매년 굵은 밤을 수확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곳에 밤나무를 심고 가꾼 어린 신랑과 신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과 미래를 준비하는 삶의 지혜와 의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리고 나무는 100년 넘도록 푸르른 신록과 열매를 선사했다. 해마다 밤알이 쏟아지는 밤나무와 주먹만한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감나무, 베어서 종이를 만드는 닥나무, 예쁜 꽃과 열매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여러 종류의 과실나무가 매년 많은 열매를 선물한다. 나무와 나무를 심은 사람이 함께 쌓아온 세월의 풍요로움이다. 그 세월 속에 사람이 나무를 닮아 가고 나무가 사람을 닮아 간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심은 밤나무는 내게 사람과 나무가 오랜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으며, 한 그루의 나무가 우리 인생의 큰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봄이 되면 모든 나무들이 열심히 새로운 가지를 뻗고 잎을 내고 또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애를 쓴다. 봄에 꽃이 핀 다음 바로 비가 내려 꽃잎이 다 젖고 엉켜버리면 그걸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안타깝고 나무도 안타깝다. 젖은 꽃잎을 말려 가며 힘들게 열매를 맺어도 여름이 되면 장마와 태풍이 연이은 시련처럼 닥쳐온다. 태풍에 휘둘리며 아직 익지 않은 열매를 생짜로 잃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가지가 무참히 찢기기도 하고 더러는 뿌리가 뽑혀 쓰러지기도 한다.

그런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낸 열매를 가을 햇볕 아래 익힌다. 나무의 한살이가 사람의 한살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 가고, 젊은이가 노인이 되어 가는 과정처럼 어린 나무가 큰 나무가 되고 고목이 되어 가는 과정이 꼭 그렇다.

이제 시골집 뒤란의 밤나무는 너무 늙어 고목이 되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안아야 할 만큼 큰 나무의 중동이 부러지고, 그런 가운데서도 새순이 나 해마다 안간힘을 쓰며 열매를 맺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 속에 간신히 열매를 지키고 또 다음해를 기약한다. 나무가 알려주는 인생의 한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올해도 간신히 한 됫박의 열매를 맺은 저 할아버지나무는 곧 겨울잠에 들어가 내년에 다가올 새로운 봄을 꿈꿀 것이다. 아직은 겨울잠 전의 가을 한중간이지만, 다가올 겨울엔 또 얼마나 많은 눈이 내려 나무를 짓누를지, 또 얼마나 혹독한 추위가 나뭇가지를 얼게 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겨내야 봄을 맞이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순원 소설가
이순원 소설가
할아버지의 모습을 닮은 저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한 그루의 나무에도 생장의 경이로움과 자연의 순리가 그대로 느껴진다. 부디 저 나무가 살아생전 할아버지의 모습처럼 오래 우리 형제들과 함께하길 바란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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