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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적자생존,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 / 정남구

등록 2015-10-27 18:44수정 2015-10-27 21:35

옛 소련의 스탈린은 1936년 본격화한 이른바 대숙청 시기에 적어도 60만명을 처형했다. 이는 훗날 소련 정부가 밝힌 수치이고, 역사가들은 많게는 200만명이 희생됐다고 본다. 살생부를 만들고 실행에 옮긴 예조프조차도 숙청의 큰 파도가 한바탕 지나간 뒤 2년 만에 처형당했다. 스탈린과 함께 찍힌 사진에서 그는 곧바로 지워졌다. 스탈린은 1937년 살생부에 서명하면서 심복인 인민위원회 의장 몰로토프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일이십년이 지나면 누가 이 하찮은 사람들을 기억할까?”

뛰어난 경제이론가로 인정받던 부하린은 스탈린의 최대 정적 가운데 하나였다. 그도 1937년 2월 체포돼 이듬해 3월 끝내 총살당했다. 부하린은 체포되기 전 2쪽 분량의 유서를 써서 아내 안나에게 외우게 하고는 바로 찢어 없앴다.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에게’라는 제목의 유서에서 그는 대숙청의 광기를 비판하고,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안나는 숙청된 고위인사의 아내로는 드물게 살아남았다. 유형지와 감옥, 수용소에서 보내는 동안 남편의 유언을 잊지 않기 위해, 안나는 날마다 기도문 외우듯 암송했다. 그렇게 9년의 세월을 보낸 뒤에야 내용을 종이에 써서 기록해둘 수 있었다.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 시대가 열려 스탈린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자 안나는 24년 만에 남편의 유언을 세상에 드러냈다. 하지만 남편의 명예를 회복까지는 그 뒤로도 26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부하린이 처형되던 해 꽃다운 24살이던 안나는 1988년 74살의 할머니가 되어 마침내 남편의 명예를 되찾아줄 수 있었다.

“권력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이란 바로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주인공 미레크의 입을 빌려 한 말이다. 그렇다. 인간은 쉽게 잊는 동물이고, 망각은 때로 편안함을 주는 유혹이다. 이에 맞서는 이들은 어려움, 두려움을 이겨내고 종이에 쓰고, 돌에 새기고, 사진을 찍는다. 그것들은 결국 다 사라질 테지만, 그것들이 있어 비로소 공동체의 기억 속에 도도한 강물 같은 역사가 새겨진다. 억압과 압제에 맞서는 민주주의는 그런 숱한 노력을 거쳐 가까스로 지켜지는 것이다.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못했다는 뉘우침을 바탕으로 역사 기록을 올바르게 함으로써 지금의 역사뿐 아니라 미래 역사까지 올곧게 바로잡아야 한다.” 이는 이해동 평화박물관 대표가 한 말이다.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공식 발표한 10월12일 열린 ‘반헌법 행위자 열전’ 편찬위원회 출범식에서다.

열전 편찬은 공직상 지위, 공권력을 이용해 내란, 민간인 학살, 부정선거, 고문·조작 등 반헌법 행위를 지시하거나 교사하거나 주요 임무를 수행·적극 묵인·은폐·비호한 이들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함이다. 열전 편찬을 제안한 것이 7월이니,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이에 두려움을 느낀 이들의 알량한 반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열전 편찬 공동제안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민주자료관장이 집중공격을 당하는 것을 보면, 지나친 추측만도 아닌 듯하다.

정남구 논설위원
정남구 논설위원
두려움을 이기는 자는 역사를 만들지만, 역사가 두려운 자들은 역사책을 뜯어고치려 하는 법이다. 그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열전 편찬에 나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한다. ‘하찮은’ 이들의 이름이 비록 잊힐지라도, 그들의 삶을 망가뜨린 자들의 이름과 행적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어렵게 싸워 얻은 민주주의가 바닥 없이 추락하고 있는 오늘, ‘적자생존’이라 쓰고,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고 읽는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억하여 전해주고, 기록하여 물려주자.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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