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면 볼수록 박근혜 대통령은 싸움을 잘한다. 여러 차례 실감한 대로 선거를 비롯한 정치적 쟁투에 그만큼 능한 사람은 한국 현대정치사에서도 그리 많지 않을 성싶다. 이번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도, 애초엔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수 언론까지 완곡하게 혹은 직설적으로 국정화에 반대했고, 교육부는 장관부터 내심 부정적이었다. 지금의 교과서가 불만스럽더라도 국정화가 그 대안일 순 없다는 생각은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많았다.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논란이 뻔한 문제로 국력과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충고도 있었다. 그 모든 반대와 신중론을 박 대통령이 ‘의지’ 하나로 밀어붙여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대통령은 줄서기를 강요한다. 주변을 다그치고 국정화를 앞장서 주장해 사람들을 그러모았다. 국회 시정연설에선 자신이 국정화의 주역이며 돌아설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를 대변한다는 사람들은 반대론을 ‘종북’ ‘비국민’으로 몰고, 급기야 ‘북한 지령’까지 운운한다. 상식과 비상식, 미래와 퇴행의 문제여서 애초 보수와 진보의 다툼일 수 없는 일을 억지로 진영 싸움으로 끌고 가려는 안간힘이다. 그런 시도대로 이제 국정화의 여론 전선은 자주 보던 이념지형을 닮아간다.
줄 세우기는 ‘배제’로 이어진다. 국정화 반대론에 철천지원수인 듯 막말을 퍼붓는다. 대통령은 역사교과서 집필진의 80%가 편향된 역사관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여당 대표는 역사학자 90%가 좌파라고 말한다. 반대하는 다수를 모두 적으로 삼더라도 밀어붙이겠다는 뜻이다. 부마항쟁의 시민들을 탱크로 뭉개면 된다던 말기 유신정권이 꼭 이랬다.
왜 그렇게 악착같을까. 대통령의 집념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라고들 한다. 그것만이 아닐 수도 있겠다. 국정화 이슈로 다른 현안들이 가려지고 있다. 거듭된 부양책에도 회생의 기미조차 없는 경제, 악화 일로인 청년실업, 방향을 잃은 외교, 천문학적인 투자에도 부실만 양산하는 방위산업, 공약과는 정반대로 추락한 복지 등 곳곳에 걱정거리가 쌓여 있다. 해결이 막막한 경제·사회적 위기를 극단적 민족주의 따위 병적인 열기나 엉뚱한 정치구호로 왜곡하려던 일은 역사에 여럿 있다. 그것까지 생각했다면 그는 정말 놀라운 싸움꾼이다.
하지만 정작 싸움은 예전 같지 않다. 이 정도로 밀어붙이면 상황을 압도하리라고 기대했겠지만, 세상은 사뭇 달라졌다. 대다수 역사학자와 전국 곳곳의 교수들이 국정화를 반대하고 나섰다. 이전 세대보다 보수적이라는 10대와 20대까지 반대행동에 나섰다. 색깔론도 약발이 떨어진 듯하다. 그동안 너무 많이 써먹기도 했지만 이번엔 유독 아무에게나 함부로 들이댄 탓이다. 그렇게 극단적이고 과격한 막말은 그만큼 다급하고 불안하기 때문이겠다. 그래서인지 줄 세운 찬성 대열에서도 건성 박수나 머뭇거리는 표정이 여럿이다. 전선은 예전 같지 않다.
정치공학으로 보면 이번 싸움은 애초 불필요했다. 여권 처지에선 굳이 억지로 보수층을 결집하지 않더라도 내년 총선 압승은 장담할 수 있었다. 온건 중도층의 향배에 좌우되는 게 한국의 선거구도라면, 낡고 거칠뿐더러 과거 퇴행인 국정화 이슈는 자칫 중도층의 표심을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기어코 국정화를 하려 들 것이다. 그 대가는 결코 작지 않다. 대통령은 이미 아무것도 한 일이 없지만 앞으로는 격해질 갈등 때문에라도 더욱 아무 일도 못하게 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다른 누구를 탓하기도 어렵다. 먼저 싸움을 건 쪽은 대통령이다. 해야 할 일들을 제쳐놓고 평지풍파의 논란을 만들어 분열과 혼란의 구렁텅이로 나라를 이끈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다. 그렇게 쌈질만 하다 자칫 곳간이 무너질 수도 있다. 쌈만 잘하는 사람은 결국 진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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