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을 위해 영어를 공부하던 20대 때, 나는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 원문을 즐겨 교본으로 삼았다. 초강대국이라 불리게 된 한 나라의 역사와 가치관, 지향점이 절제된 형식으로 녹아 있는 연설문은 단순히 언어만이 아닌 다양한 층위의 감흥과 정보를 주었다. 몇 년 전 박근혜 대통령이 외국에 가서 그 나라 언어로 연설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는 대뜸 일군의 외국인들, 한류의 영향으로 제법 머릿수를 늘려가고 있을 한국어 학습자들이 떠올랐다. 한국 대통령의 연설을 교본으로 삼고 싶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대통령이 외국어로 연설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통령의 외국어 실력에 놀라고 감탄했을까? 생각할수록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은 지난달에 있었던 대통령의 국회 연설을 지켜볼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경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 “에너지 바우처를 새롭게 도입”, “콘텐츠 코리아 랩”, “농업에 아이시티(ICT)를 접목한 스마트 팜”, “뉴 스테이”…. 대통령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영어 단어들을 들으면서 나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왜? 왜 저렇게 말해야 하지? ‘에너지’처럼 이미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단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골든타임이나 바우처 같은 단어는 충분히 한국어로 대체할 수 있지 않은가? ‘경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에너지 상품권 제도를 새롭게 도입’이라고 하는 게 이해하기도 훨씬 좋지 않은가? “기업수요와 일자리 공급 간 미스매치”라는 말을 들을 때는 차라리 마음이 짠했다. 우리 대통령께서 지적이고 전문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많이, 매우 많이 주고 싶으시구나!
연설 다음날,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온 한 정치평론가가 연설 내용에 대해 평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청년펀드 같은 건 레귤러하게 시스템으로 정착시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이렇게 랜덤하게 돈을 모으죠?” ‘레귤러’라는 말이 날아와 귀에 꽂히는 순간, 대통령의 연설에 그토록 많은 영어 단어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지형이 눈앞에 선명하게 나타나 보이는 듯했다. 이러니 누굴 탓하겠어!
말할 때 영어를 섞어 쓸수록 찌질해 보인다고 생각하기에 가급적 영어를 섞어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나도 모르게 영어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모든 말하기를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로 할 수 없기에 급하게 단어를 찾다 보면 한국어보다 영어가 먼저 떠올라 그대로 발화해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다. 도대체 왜, 그럴 의도가 없는데도 내 입에서 자꾸 영어가 튀어나오는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자꾸 들으니까. 자꾸 들으면 자꾸 쓰게 되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국어를 자꾸 듣게 될까? 그것도 간단하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자주 나오는 사람들, 그러니까 대통령이나 정부 관계자, 혹은 평론가 같은 사람들이 한국어를 많이 쓰면 된다. 특히 정부는 한류 확산을 몹시 환영하고 지원해주고 싶어 하지 않는가? 외국에 나가서 정상이 한국어가 아닌 말로 연설하고, 국내 연설에서 자꾸 한국어가 아닌 말을 쓰는 것만큼 한류 확산을 저해하는 행위가 또 있을까? 어느 자리에서든 정제된 한국어를 또렷하게 구사하는 행위가 우리 고유의 의상을 자꾸 입어 보여주는 것 못지않게, 한글날에 한글을 사랑하자는 글귀를 페이스북에 남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국위선양임을 텔레비전에 매우 자주 나오시는 대통령께서 부디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
정아은 소설가
정아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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