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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교과서와 국민 정서 / 이순원

등록 2015-11-20 18:58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학교에서 무얼 어떻게 배우는가가 개인에게도 중요하고 나라에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1963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국어책에 나오는 남자아이 이름은 철수였고, 여자아이 이름은 영희였다. 그래서 지금도 철수와 영희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남녀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 그때 영수나 명희라는 이름이 처음 나왔다면 또 그렇게 알았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서 나온 ‘밤마다 밤마다 / 잠도 못 잤는데 / 어쩌면 포동포동 / 살이 / 쪘을까?’ 하는 보름달 동시를 그걸 배운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외우고 있다. 틈틈이 읽어서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때 보고 다시 본 적이 없는데도 그렇다. 교과서에 무엇이 나오고 안 나오고는 한 개인의 정서에도 이토록 중요하다.

교과서에 나온 글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온 글만큼이나 가슴에 새기고 있는 영어 명언이 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 윌리엄 클라크가 한 말이다. 이 말은 사실 영미권에선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말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 말도 아닌데 중학교에만 들어가도 저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과정을 좀 더 설명하면 일본 삿포로농학교를 설립할 때 교감으로 와 있었던 윌리엄 클라크가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 자신을 배웅 나온 학생들에게 말 위에 앉아 그렇게 말하고, 그의 말을 들은 제자가 나중에 학교에 와서 자기 후배들에게 강연을 하며 그 말을 인용했다. 그게 학교 동창회지에 실리고, 도쿄로 전해지고 일본 전국에 퍼져나가고, 또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와 일본 영어참고서에 실렸다.

홋카이도대학(옛 삿포로농학교)에 가면 정문 가까운 곳에 윌리엄 클라크의 얼굴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동상도 그 자리에 먼저 세웠던 것은 미국과 전쟁을 하는 동안엔 원수 나라 사람의 얼굴이라고 무기 공장으로 실어 가고 나중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어떤 과정을 거쳤든 일본 사람들에게 그 말은 국민격언과도 같은 말이 되었다. 우리는 별로 그럴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일본 영어참고서를 거의 그대로 베낀 한국 영어참고서에 이 말이 실리면서 우리에게도 국민격언이 된 것이다.

학생 웅변대회 때마다, 또 나이든 교장 선생님이든 젊은 선생님이든 거의 모든 선생님의 훈화 때마다 이 말을 하니 나중에는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거의 국민윤리 수준의 강요였다. 그때 그 선생님들이 이 말이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전달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훈화 때마다 그 말을 하고 또 하고 그랬을까.

내가 중학교 때 배운 ‘로렐라이 언덕’이라는 노래 역시 그렇다. 애초 이 노래는 일본 중·고등학교 음악책에 실렸다. 예전 일본과 독일의 동맹국 관계가 그렇듯 일본 음악책에 프랑스나 영국 미국 러시아 노래는 실을 수 없었고, 독일 노래인 로렐라이, 잘 있거라 내 고향, 들장미 등이 수록되었고, 이걸 그대로 우리나라 음악교과서가 베껴 와 로렐라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국민가곡처럼 불렀던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 역시 일본 음악책 가사를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이순원 소설가
이순원 소설가
누가 누구를 상대로 어디에서 한 말이든, 또 어디에 실린 노래를 누가 어떻게 베껴 왔든 그 말의 본뜻만 좋고 노래만 좋으면 그만이지, 별걸 다 따진다고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쟁을 보며 새삼 참 많은 것이 떠오른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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