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역사교과서 제작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집필진도 구성되었고 집필기준도 곧 발표된다고 하니 이제 실제로 쓰는 일만 남은 셈이다. 복면 집필진이 쓰는 교과서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고,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내용이 될까 봐 우려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국정화의 논리가 ‘균형 잡힌 교과서’라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동안 ‘균형 잡힌 교과서’의 중요성을 계속 이야기했고, 교육부 역시 ‘균형 잡힌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하고 있다. ‘우편향’ 교과서를 우려하는 이들은 이 ‘균형 잡힌’이라는 수식어가 숨은 의도를 감추기 위한 미사여구에 불과하다고 보겠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볼 여지는 있을 것 같다. 이 논리가 어떤 일관된 흐름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본에서 역사교과서에 대한 검정기준을 강화해 노골적으로 국가개입을 추진해온 아베 신조 총리가 누누이 강조해온 것 역시 ‘균형 잡힌’ 역사교육의 필요성이었다. 한국 언론은 대체로 이것을 ‘역사 왜곡’이라는 표현으로 보도하지만, 실제로 올해 이루어진 검정 과정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 여러 견해를 제시해 정설이 없다고 쓰게 하는, 어떻게 보면 ‘객관적인’ 수정 요구였다. 그들은 대놓고 ‘대일본제국’을 찬양하고 ‘대동아전쟁’을 긍정하려는 서술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물론 ‘아직’ 거기까지 나가지 못한 것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베가 ‘교육개혁’을 추진할 때 모델로 삼은 것이 1980년대 후반 영국에서 마거릿 대처 총리가 추진한 ‘개혁’임을 떠올린다면 조금 다른 맥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1980년대 후반 영국에서 역사교육이 정치적 이슈가 됐을 때도 발단이 된 것은 ‘편향 역사교과서’였다. 영국의 인종주의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 가르치는 교과서를 공격하면서 대처 정부는 역사교육의 커리큘럼을 국가가 관리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대처는 늘 애국심을 강조했지만, 역사교육에 개입했을 때 그가 추진한 것은 애국심을 주입하는 식의 역사교육은 아니었다. 그가 실제로 한 것은 주제학습식 역사교육을 연표식 역사교육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교과서가 자유발행제이고 현장 교사들의 재량이 컸던 영국에서는 다양하고 자율적인 역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런 교육을 ‘편향’으로 간주해 연표로 상징되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를 가르치도록 한 것이다. 또한 이 ‘개혁’을 거치면서 노예무역과 같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아프리카인들 가운데에도 이익을 챙긴 이들이 있었다는 식의 ‘객관적’ 서술이 나타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면서 추진된 이 ‘균형 잡힌’ 역사교육의 목적은 교육을 통해 생겨날 수 있는 ‘편향’된 주체들을 처음부터 봉쇄하려는 데 있다. 그동안 뉴라이트를 비롯한 이들이 진행한 역사 다시 쓰기 작업에서도 핵심을 이룬 것은, 식민지배나 독재와 같이 어떤 적대를 드러내고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부분을 완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친일이나 독재를 적극적으로 미화하려 했다기보다는, 그것을 어쩔 수 없었던, 담담하게 받아들일 만한 ‘객관적 지식’으로 만듦으로써 학생들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판단할 여지를 없애려고 했을 뿐이다.
민주주의가 끊임없이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나가는 역동적 시스템이라고 한다면, 그 역동성을 담보하는 것은 다름 아닌 편향이다. 많은 편향이 생겨나야 사회는 더욱 생동한다. 편향의 억제란 민주주의의 죽음을 의미한다. 균형은 교과서에서 잡는 것이 아니라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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