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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상고법원 실패기 / 여현호

등록 2015-12-01 19:08

“정부도 소극적 입장이고 위원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해서…, 당분간은 다시 상정하기 어려워 보이기는 합니다.” “정기국회 마지막 소위에서라도 한 번 더 짧은 시간이라도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으면 하는 게 저희 바람입니다.” “사정이 쉽지는 않은 듯한 느낌이 들고…, (일단) 계속심사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11월24일 국회 법제사법위 법안심사 제1소위에서 상고법원 신설 관련 법안의 처리를 놓고 이한성 소위원장과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 사이에 오간 대화다. 법안 처리가 어렵다는 완곡한 통고와, 알면서도 어떻게든 붙잡아보려는 미련이 생생하다.

상고법원 신설안의 국회 통과는 이제 물 건너간 듯하다. 지난해 12월 법안 발의 뒤 처음 본격 심의가 이뤄진 24일 회의에선 법무부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소위의 과반인 4명이 반대했고, 찬성은 1~2명에 그쳤다. 이 정도면 법안 통과는 어렵다. 계속 논의한다지만 언제 다시 상정될지조차 알 수 없다. 정기국회가 끝나면 총선을 앞둔 내년엔 더더욱 기대하기 힘들다. 결국 법안은 19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될 공산이 크다. 재야 법조계와 시민단체의 반대도 여전하니, 말 그대로 사면초가다.

이런 결과는 다소 의외이기도 하다. 상고법원을 겨냥한 법원의 로비는 대단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뜻이 굳어지면서 법원은 총력전을 준비했다. 통상의 인사를 거스르면서까지 국회와 언론 설득에 경험이 있는 판사들로 법원행정처에 ‘드림팀’을 짰고, 지난해 초부터는 이런저런 ‘애드벌룬’으로 여론 조성에 나섰다. 로비에 나선 판사들이 국회의원과 의원 보좌관들에게 성심성의껏 접대를 다한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고위법관들이 언론사를 돌며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법정 밖에서 이렇게 자주 판사들을 본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랬는데도 로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유는 많겠다. 심급 구조의 변경이어서 개헌에 준하는 중대사안인데도, 법조계와 시민사회에 대한 설득은커녕 행정부와의 의견 조율도 없이 의원입법 형식으로 쉽게 일을 추진하려 했던 편의주의적 발상부터가 애초 잘못이겠다. 우호적 언론을 통해 외곽에서 국회를 ‘때려’ 압박하는 전략도 반감을 샀음 직하다. 여론이 좀체 돌아서지 않자 ‘상고법원 신설’ 대신 미리 준비한 ‘대법원 내 상고재판부 설치’ 등의 수정안을 법원이 직접 꺼냈지만 대세를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전략과 기교, 밤낮 가리지 않는 로비만으로는 부족한 그 무엇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사법부로선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사심’을 의심받은 게 그 원인일 수 있다. 법원이 ‘국민 재판권의 실질적 보장’ 따위를 앞세우지만 실제로는 사법권력과 조직 이익의 관철을 위해 저런다고 생각한 사람은 의외로 많다.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상고법원을 통해선 권리구제의 최종심이라는 기존의 사법권력을 유지하고, 부담이 많이 줄어들 대법원을 통해선 정책법원이라는 사법권력도 강화하려는 ‘양손에 떡’ 심보라는 것이다. 상고법원이 법원 내 인사적체 해소 장치라는 풀이도 공공연했다. 그런 ‘속셈’ 때문만은 아니었더라도, 법원이 온갖 비판과 논란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 탓에 결국 국민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은 분명하다.

여현호 논설위원
여현호 논설위원
이제 다음 일을 걱정할 때다. 지나치게 무게를 실으면 더 크게 휘청대기 마련이다. 이럴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개혁은 국민의 필요가 모일 때 가능한 것이지, 누구의 의지만으론 어렵다는 게 새삼 드러났다. 많은 이들이 상고법원 논의 과정에서 사실심의 충실화, 대법원의 다양화 등이 우선이라고 지적했으니 그것부터 하나하나 실천하는 게 정도다. 그래야 뭘 해도 설득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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