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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따뜻한 겨울밤의 추억 / 이순원

등록 2015-12-18 18:38

긴 겨울밤, 지금도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다른 가족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혼자 자지 않고 어두운 호롱불 아래에서 옷을 꿰매고 양말을 꿰매던 어머니가 어느 결에 첫새벽에 일어나 맷돌에 콩을 갈아 가마솥 가득 두부까지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 생각에 어머니는 참 잠이 없었다. 할머니도 잠이 없어 어린 우리는 어른들은 원래 그렇게 잠을 안 자도 되는 줄 알았다.

겨울에 엿을 고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쌀엿을 고기도 하고 강원도에 많이 나는 옥수수로 엿을 고기도 한다. 밀의 어린 싹을 내어 단맛을 내는 질금도 지금은 참 보기 힘든 물건이 되었다. 아침 일찍 가마에 여물을 끓여 외양간 구유에 퍼준 다음 거기에 엿을 하루 종일 곤다. 물이 줄어들어 국물이 걸쭉해지면 절반은 더욱 굳혀 엿으로 만들고, 절반은 손끝으로 찍으면 꿀처럼 쭉쭉 늘어나는 조청으로 만들어 따로 커다란 동이에 보관했다.

명절이 아니더라도 이따금 떡도 집에서 해 먹었다. 함지 가득 인절미를 만들어 광에 보관해 두고두고 먹고 절편도 만들고 겨우내 간식으로 먹을 취떡을 만든다. 취떡은 쌀떡에 취를 넣어 쑥떡보다 조금 더 검은색이 난다.

이 떡을 형제들이 화롯가에 빙 둘러앉아 저녁마다 구워 먹는 맛도 각별하다. 화로 위에 석쇠를 얹고, 그 위에 바짝 얼고 굳은 떡을 올려놓고, 그것이 따뜻하게 풀어질 때까지 형제들이 장난을 치기도 하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해주는 옛날얘기를 듣기도 한다. 꿀은 귀해서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고, 조청 한 종지 떠 와서 그걸 찍어 먹는다. 조청을 바른 떡도 우리 입에 짝짝 달라붙고, 할머니의 이야기도 우리 귀에 조청처럼 짝짝 달라붙는다. 떡과 함께 과자처럼 먹는 과줄과 약과도 자급자족하듯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흙벽으로 쌓은 헛간 안쪽에는 겨우내 또 하나의 간식거리가 담겨 있는 등겨가마니들이 놓여 있다. 사과를 담아놓은 등겨가마니와 연시를 담아놓은 등겨가마니, 그리고 석류를 담아놓은 등겨가마니다. 사과도 연시도 석류도 그냥 그것만 두어서는 오래 보관할 수 없다. 그것들은 등겨가마니 속에서 얼지도 썩지도 않고 한겨울을 나는 것이다.

형제들 중 누가 감기라도 걸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 할아버지가 제일 큰형에게 헛간에 가서 석류 한 알 내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겉보기엔 탐스러워도 막상 속을 갈라 보면 다른 과일보다 빈약한 게 석류다. 사랑방 화롯가에 제비 새끼들처럼 들러붙어 앉아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내미는 어린 손자들 손바닥에 할아버지는 앵두보다 더 작고, 앵두보다 더 먹을 게 없는 과육 몇 점씩을 떨구어준다.

그러나 그 향긋하고도 새콤한 맛을 어느 과일이 따라올까. 참 이상하게도, 그 석류 몇 알 받아먹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기침은 이내 멎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제들이 돌아가며 감기를 앓았던 것이 아니라, 돌아가며 당번을 정해서 저녁마다 할아버지 앞에서 응석 기침을 했던 것이다.

며칠 전 슈퍼에 갔다가 석류가 보이길래 박스째 사들고 왔다. 이 과일 하나에 우리 형제들 모두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 어린 시절 겨울밤의 추억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과일 하나, 음식 하나 속에도 저마다 통과해온 시간이 있는 법이다.

이순원 소설가
이순원 소설가
그때 우리의 간식을 굽던 질화로들은 다 어디 갔을까. 또 화로 위에 떡을 올려놓았던 석쇠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형제들도 일년에 몇 번 명절 때만 모인다. 그 시절, 따뜻했던 겨울밤의 추억 속으로도 인생은 이렇게 지나간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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