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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선희의 밑줄긋기] ‘고용 털어버리기’에 맞서기

등록 2015-12-24 18:41수정 2016-01-22 14:33

미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와일은 저서 <균열 일터>에서 1980년대 이후 미국의 기업들이 임시직, 하청, 프랜차이징, 오프쇼어링(해외하청)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직접고용(정규직)을 ‘털어내버리는’ 모습을 묘사한다. ‘고용 털어버리기’의 가장 큰 목적은 비용절감이다. “시장 상황이 어떻든 기업체는 최대한 비용을 낮추는 게 목표”이기 때문이다. 줄어든 임금비용은 투자자와 경영진으로 흘러들어갔다. 미국에서 빈부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배경이다.

우리나라 기업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계약직에서 파견으로, 파견에서 하청으로 조금 더 싸고 규제를 덜 받는 일자리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여왔다.

기업간 경쟁 심화, 세계화, 자동화, 정보통신(IT)기술 발달 등 시장의 흐름은 모두 고용털기를 부추기는 쪽이다. 시장의 힘은 무섭다. 어설프게 맞서면 바보 된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시장논리에 끌려온 결과 남은 것은 ‘헬조선’의 현실이다.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여간한 체력과 의지로는 힘든 법이다. 제자리에만 있으려 해도 다리에 힘을 꽉 줘야 한다. 정부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이른바 ‘노동개혁’이 기업들을 위해 국민을 모두 비정규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는 비난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부가 강물에 맞서려는 의지가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집회에 가보면 대안이 모든 노동자의 정규직화다. 그게 과연 실현가능성 있는 거냐.” 이런 말들도 했다. “최악은 피해야 할 것 아니냐. 도급보다는 그래도 파견이 낫다.” “민주주의에서 도급관계 규제는 불가능하다.”

한 노동문제 전공 교수는 “‘정규직 확대 목표는 포기하겠다. 비정규직을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비정규직 처지를 조금이라도 낫게 하는 것이 목표다’라는 인식과 ‘정규직을 늘리고 비정규직을 줄이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을 써야 한다면 되도록 좋은 여건을 만드는 것이 부차적 목표다’라는 인식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전자로 보인다.

정부의 이런 태도는 정부 여당이 추진 중인 ‘양대 지침과 5대 법안’의 내용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저성과자 해고 요건을 명확히 하고 취업규칙을 노동자 과반 동의 없이도 바꿀 수 있도록 하는 두 가지 지침은 정규직의 고용조건을 낮출 것이다. 정규직과 관련해 임금체계, 노동시간 등에서 일부 유연성 도입이 필요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고용안정성의 보장과 함께 가야 한다. 청년고용할당, 일자리 나누기 등 ‘괜찮은 일자리’를 추가로 만들어낼 구체적인 방안도 같이 제시돼야 한다.

기간제(계약직) 사용기한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기간제법, 파견을 고령자·전문직·뿌리산업까지 허용해주자는 파견법은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도 ‘어차피 정규직은 안 되니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늘리자. 비정규직이라도 오래 다니게 해주자’는 취지다. 모두 기업들이 요구해온 조처들이다. 반면 비정규직 남용·차별 방지, 불법파견 근절, 원·하청 성과 공유 등을 위한 강력한 조처는 없다.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현대 사회의 두개의 주요한 권력체계는 정부와 기업이다. … 사람들은 정부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권력체계(기업)에 맞서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장치이기 때문에 정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목표가 단순히 ‘기업과 국민 사이에서 균형 맞추기’, 더 나아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가 돼서는 안 된다.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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