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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선희의 밑줄 긋기] 길잡이는 됐고 정책을 보여주세요

등록 2017-01-26 17:50수정 2017-01-26 20:23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반기문씨가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돼 한국을 떠난 것이 2006년 말이다. 이후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세계를 가슴에 품어라> <반기문 총장님처럼 되고 싶어요> 같은 책들이 50종 넘게 쏟아졌다. 대부분 청소년을 상대로 한 위인전 성격으로, 내용은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답니다’를 벗어나지 않는다. 자식이 반 전 총장을 본보기 삼아 성적을 올렸으면 하는 대한민국 학부모들의 소망 탓에 현재 20~30대 초반 청년세대 중 ‘반기문 위인전’ 한권쯤 안 읽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10년 동안 반 전 총장은 명예와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반기문 위인전을 쓴 어떤 저자는 인세 수입으로 돈방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 책을 읽은 청소년들은 한국 역사 최초의 ‘고학력 저임금 세대’가 되었다. 등록금 1000만원 시대, 학자금대출 받아 겨우 대학을 다녔지만, 졸업 뒤 실업자가 되거나 원리금 상환에도 역부족인 월급을 받는다.

1월12일 귀국한 반 전 총장은 귀국 연설에서 “젊은이의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해서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고 말했다. 연일 이어진 행보에서 그는 “인턴이나 보조사원을 확대하면 어떻겠나” “노력하면 기회가 온다고 본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 만큼 해외로 진출하고, 정 일이 없으면 자원봉사라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현실을 전혀 모르는 발언들이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25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반 전 총장은 청년실업 대책을 묻자 두루뭉술하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대답을 내놨다.

“경직된 노동시장을 유연화해야 한다.

교육과 취업전선 미스매칭, 대기업-중소기업 격차가 문제다.

기업이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 기업이 신이 나서 할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들이다. 맞다.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9년 동안 수도 없이 들은 말이다. 하긴 반 전 총장 캠프의 주축이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이주호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등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사회정책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라고 하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 시절 경제관료들과 사석에서 청년실업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옛날 같으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중소기업이나 공장에 취직했을 아이들이, 우르르 대학 가더니 졸업하고 대기업만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대학을 안 나오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사회 풍토, 결혼·출산도 포기할 정도로 열악한 중소기업의 임금·노동조건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물론 그들의 자녀는 부모의 해외근무 덕에 익힌 외국어 실력과 강남 사교육으로 무장한 뒤 특목고-명문대-해외유학을 거쳐 대기업이나 전문직으로 취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10년 가까이 비슷한 정책을 계속했는데 상황이 나빠지기만 한다면 좀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는 게 정상적인 정부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이전 정부들이 잘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등록금, 사교육비, 주거비가 가장 급등했던 때는 참여정부 시절이었다는 점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들은 기억해야 한다.

반 전 총장이-그뿐 아니라 모든 정치인들이- 자신의 꿈을 위해 청년들의 ‘표’가 필요하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먼저 잘 듣고, 그들이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어설픈 멘토 흉내는 그만두고 말이다.

청년 직장인들의 애환을 담은 책의 제목(<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에 빗대 보자면 “아, 길잡이는 됐으니 제대로 된 정책을 보여주세요”.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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