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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선희의 밑줄 긋기] 노란 리본, 검은 리본

등록 2016-12-29 18:30수정 2016-12-29 20:51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는 여전히 노란 리본을 만든다. 노란리본공작소 안에 자원봉사자들이 삼사오오 모여 앉아 리본을 만들고 시민들에게 나눠준다. 분향소, 전시관, 서명대 천막들 사이에 서 있는 ‘기억의 문’에는 희생자들 사진이 든 304개의 별들이 매달려 있다. 전시관 옆 글귀처럼 “하늘에 갑자기 생겨나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들”이다.

한 천막에 단원고 학생들의 1학년 때 단체사진이 붙어 있다. 배트맨 흉내를 내는 아이, 브이자를 그리는 아이, 활짝 웃는 아이, 침울해 보이는 아이…. 누구나 앨범에 한장씩 가지고 있는 사진들이다. 세월호 광장에서 가장 슬픈 곳이다.

고작 열일곱 해를 살고 떠난 아이들. 이 아이들과 같은 해 태어나 겨우 두 해 더 머물렀던 아이가 있었다. 올해 5월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 중 사고를 당한 서울메트로 하청업체 직원 김군이다. 겉모습은 무뚝뚝하지만 속 깊고 착한 아이, 장남으로 공고에 가서 우선 취업해 가정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했던 아이, 가방 속에 공구와 컵라면과 스테인리스 숟가락을 넣고 다녔던 아이.(김군 어머니)

초여름 어느 저녁, 구의역 승강장에는 수천장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고작 19살 열심히 일했을 뿐입니다.” “나의 꿈은 자연사이다.” 승강장 옆, 누군가 만들기 시작했다는 검은 리본들과 하얀 국화가 놓여 있었다.

삶도 그렇듯이, 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지난하고 지루한 과정이다.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은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우린 모두 어떤 사회를 원하는지, 각자의 북극성을 찾아야 한다. 그 모습이 서로 다를지라도, 그래서 촛불집회에서 느꼈던 일체감이 어쩌면 낯섦으로 바뀔지라도 일단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나를 포함해 어떤 사람들에게 그 사회는 더이상 슬픈 리본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사회다. 내 아이가 자연사할 수 있는 사회다. 이 당연하고 소박한 소망조차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가.

과적을 위해 평형수까지 빼버렸던 세월호처럼 한없이 이윤을 챙기려는 기업의 탐욕을 제어해야 한다. 안전규제를 완화해주고 산하기관 자리를 챙겼던 관피아처럼 공익을 사익과 맞바꾸지 않는지, 정부를 감시해야 한다. 효율화라는 미명아래 필수업무까지 외주화한 서울메트로처럼 인건비 절감을 위해 비정규직 양산을 당연시하는 기업의 행태를 바꿔야 한다. 그 자신 ‘을’이면서 김군의 희생을 방조했던 낙하산 퇴직자들처럼 구조가 강제한 먹이사슬 속에 안주하려는, 내 안의 본성과 싸워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위해 어떤 법률과 제도를 고쳐야 하는지, 새로 만들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이런 개혁을 위해 애쓸 의지가 있고, 이를 현실화할 전략이 있는 정당과 정치인을 찾아야 한다. 이들을 되도록 많이 국회와 정부로 보낼 수 있는 선거제도는 무엇인지 따져야 한다.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한쪽에선 청렴하고 유능한 누군가가 내가 원하는 사회를 대신 만들어줄 것이라는 수호자주의가, 다른 쪽에선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냉소주의가 유혹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말을 빌려) 정치는 너무 중요해서 정치인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고 되새기는 것, “자기 권리와 이익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호자는 바로 당사자 자신”이라고 했던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기억하는 것,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도 놀랐던 촛불집회의 힘을 잊지 않는 것이다.

2016년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밤, 책상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노란 리본과 검은 리본을 바라보며, 새해에는 더 많은 성찰과 공부와 의지가 필요할 것이라고 그렇게 가만히 생각해본다.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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