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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소녀가 다시 끌려가게 해선 안된다 / 정남구

등록 2015-12-31 18:35

2013년 9월까지 3년 7개월간 도쿄 특파원으로 일한 인연으로 서울에서 일하는 일본 언론인들과 가끔 만날 기회가 있다. 지난해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한-일 관계 회복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위안부’ 문제가 언제쯤 해결되겠느냐는 것이었다. 내 의견은 꽤 단호했다. 결코 완전한 해결은 안 될 것이라고. 일본이 역사를 직시해 위안부 강제동원이 인륜에 반하는 범죄였음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해야만 풀릴 사안인데, 아베 신조 총리 정부가 그럴 리 만무하다고 나는 봤다.

내가 틀린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8일 양국간 협의가 타결됐다고 했다. 아베 총리는 피해자를 놔두고 대통령에게 전화로 뜻 모를 사과를 했다. 일본은 위로금으로 10억엔을 내놓기로 했다. 내가 아베 총리를 잘못 본 건 아니다. 박 대통령을 잘못 봤다. 그분도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해 나와 비슷한 역사인식을 가진, 비슷한 체온을 가진 한국인이라고 믿었다.

나는 양심적인 일본인을 많이 안다. 그러나 일본 국가는 그 양심이 힘을 얻는 것을 극도로 억눌러왔다. 히로히토 ‘천황’이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던 1988년 12월7일, 나가사키 시의회에서 한 시의원이 모토시마 히토시 시장에게 물었다.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는 천황이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발언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마음을 속일 수 없다”며 거부했고, 자민당에서 제명당했다. 우익단체 회원들이 떼지어 그의 죽음을 요구했다. 이듬해 1월7일 히로히토가 사망한 뒤, 18일 한 극우주의자가 그의 등 뒤에서 총을 쐈다.

1994년 일본인과 독일인이 어떻게 다르게 전쟁을 기억하는지 추적한 책을 쓴 네덜란드인 이안 부루마는 두 나라의 차이를 문화적,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인 것이라고 봤다. 패전 뒤에도 일본은 지난날의 전쟁범죄를 청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미국의 옹호 아래 전쟁 책임이 있는 이들이 권력을 고스란히 되찾았다. 강제노동을 총지휘해 A급 전범으로 구속됐다 풀려나 나중에 총리가 된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자민당 권력에 틈이 생긴 미야자와 내각 때 위안부를 군이 강제동원했음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 8월), 무라야마 총리의 식민지배 사과(1995년 8월)를 본 뒤인 2003년 부루마는 ‘일본이 과거의 어두운 부분을 토론할 수 있는 정상적인 국가에 한발 다가섰다’고 봤다. 지나친 기대였다.

아베 총리는 외할아버지의 역사인식과 정치철학을 철저히 계승한 인물이다. 외할아버지가 꿈꾸던 헌법개정을 실현해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만드는 것을 소명으로 여긴다. 그런 그에게 침략의 역사, 특히 가장 약한 고리인 ‘위안부’ 강제동원과 난징학살은 콘크리트 더미 안에 단단히 묻어 더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싶은 것일 뿐이다. 그에게 ‘위안부’ 문제 타결이란 단지 ‘불가역적이고 항구적인’ 피해자들의 침묵을 약속받는 것이다. 이를 안다면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노력을 있는 그대로만 평가하고, 최종적 해결 여부는 피해자 할머니들과 국민의 판단에 맡겨둬야 마땅했다.

정남구 논설위원
정남구 논설위원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길에, 무릎 위에 주먹 쥔 손을 올려놓은 한 소녀가 앉아 있다. 집으로 돌아가 가족의 품에 안겨 모진 세월 한바탕 눈물로 씻어버리고, 학교에도 다니고 동무들과 재잘거리며 노는 꿈을 아직 포기하지 않은 소녀다. 소녀는 지금 주먹을 쥐고 일어서고 싶을 것이다. 그 소녀가 다시 끌려가게 둔다면, 우리가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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