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적’이라는 말도 고약하지만 ‘불가역적’은 더욱 고약하다. 그 말을 사람들이 알아듣기 가장 쉬운 말로 하자면 일수불퇴, 낙장불입이 될 것이다. 점잖은 외교관들 체면에 그런 표현을 쓸 수는 없다 쳐도 같은 의미의 쉬운 우리말이 널려 있는데 왜 그런 어려운 한자말인가. ‘되돌릴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등의 말은 그 자체에서 머뭇거림, 망설임, 번민이 묻어난다.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게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를 이 단어들은 스스로 말한다. 반면에 불가역적은 사뭇 오만하고 기만적이다. 마치 ‘불가역성’이 자연의 법칙이나 되는 것처럼 가장한다. 불가역적이라는 말은, 물리고 싶지만 물릴 수도 없는 대통령과 이 정부가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흐리는 교활한 언어다.
정부는 한-일 협상 결과를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서’라고 강변한다. 정작 피해 당사자들은 싫다는데 ‘당신들을 위한 선물’이라고 떠안기며 생색을 내는 게 어느 나라 법도인지 모르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의문은 이 정부와 박근혜 대통령의 가슴속에 진정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는가다. 박 대통령은 취임 뒤 여태껏 위안부 피해자들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2013년 7월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면담 요청을 청와대가 거부했다”는 언론 보도를 놓고 논란이 빚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청와대에서 들려오는 말은 “검토 중”이다.
사랑의 본질은 관심과 배려다. 매몰차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면서 상대를 위한다는 말을 입에 올릴 수는 없다. 이 정부한테 위안부 할머니들은 애틋한 관심과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국제 역학관계 설정 과정에서의 하나의 외교적 카드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거두기 힘들다. 일본은 뉘우침의 진정성이 없었고, 우리 정부는 애정의 진정성이 없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출발한 협상이 어떤 목적지에 이를지는 명확하다.
더 근본적인 의문은 일본의 아베 신조 정부와 우리 정부의 과거사 인식 간에 정말로 큰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거의 비극적 역사를 직시하고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려는 노력을 이 땅의 극우세력들은 일본을 본떠 ‘자학사관’이라고 매도한다. 그들이 박 대통령을 떠받치는 세력이고, 그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강행되는 게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다. 황교안 총리가 “유일하게 편향되지 않은 교과서”라고 극찬한 교학사 교과서는 애초 “위안부들이 일본군을 따라다녔다”고까지 썼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2014년 1월에 이 교과서를 채택한 대구의 한 고등학교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울분을 토로했던 바로 그 교과서를 이 나라 총리가 입에 거품을 물고 칭찬할 때부터 비극적 협상 결과는 이미 예고됐던 셈이다.
이 정부가 피해자나 약자를 대하는 방식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어 보인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손도 잡아주고 달래는 척도 하지만 어느 순간 매정하게 돌아선다. 피해자들은 정부가 그어놓은 일정한 선 안에서만 고통과 슬픔을 삭여야 한다. 그 선을 넘는 순간 정부는 그들의 분노와 슬픔을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퇴행적이고 소모적인 행동으로 몰아세운다. 이런 광경을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뚜렷이 목격했다.
청와대는 이미 시민사회단체와 언론 등을 향해 “마치 정부가 잘못 협상한 것같이 여론을 조성한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달래기 위해 노심초사하지만 피해자들이 협상 결과 수용을 계속 거부하면 어떤 태도로 돌아설지 예측하기 어렵다. 시민사회와 대학가 등의 위안부 협상 반대 시위에 대해 새누리당이 역사 교과서 때처럼 “북한의 지령을 따른 것인지 수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는 법도 없다.
불가역적이라는 말은 불길하다. 그 말은 위안부 협상 결과에 ‘불가’를 외치면 ‘역적’으로 몰아갈 것만 같은 예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기우에 불과할까. 세월호 참사 초기에 정부가 지금처럼 희생자 유족들을 대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이 정부는 언제나 상식과 예상을 뛰어넘는 ‘상상 그 이상’의 정부임을 잊지 말자.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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