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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추억도 자본이다 / 최우성

등록 2016-01-07 18:42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열풍이 정점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드라마를 패러디한 광고가 곳곳에 넘쳐나고, 드라마 속 장면에 잠시 한 다리라도 걸친 기업들은 관련 제품 마케팅이나 기업 홍보에 한창이다.(<한겨레>도 깜짝 출연했다!) 영화 <국제시장>과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 -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가 복고몰이 대표주자로 나섰던 1년 전 이맘때를 떠올리게끔 한다.

울트라 복고 정권이 나라를 주무르고, 몸져누운 경제마저 당최 기력을 되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복고 열풍이 불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다. 불황일수록 옛것에 더 끌린다는 건 경제사의 상식처럼 돼버렸다. 딱 꼬집어 정확한 원인을 찾기는 힘들겠으나, 아마도 불만(현재)과 불안(미래)이 버거운 현실을 떠나 ‘이미 겪은 세상’으로 잠시 외출·대피하고픈 심리를 마구 자극한 탓이 크리라 짐작할 수 있다. 자본의 입장에선 추억이라는 이름의 문화상품을 내세워 한철 장사하기 제격인, 말 그대로 대목 만난 셈이다.

사람과 종잣돈을 버무려 물건을 만든 뒤 이를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이 바로 자본의 일상일 터이나, 어찌 보면 시간과 공간의 무한확장과 재배치야말로 자본의 진짜 재주가 아닐까 싶다. 예컨대 총칼을 앞장세워 전세계를 휘젓던 제국주의의 군불을 땐 게 식성에 비해 시장의 크기가 작다고 느낀 자본의 공간 이동이라면, 소비자로 하여금 미래소득을 앞당겨 끌어쓰도록 유인하는 신용카드는 시간 이동의 좋은 예라 할 만하다. 이제 흘러간 과거마저 판매 품목에 올리는 건 리패키징·리뉴얼쯤 되려나.

하지만 최근의 ‘응팔’ 열풍에선 차분히 짚어봄 직한 대목이 적잖다. ‘그때, 우리’라는 한마디로 손쉽게 정리되는 추억의 단일화는 같은 세대 안에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불평등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게끔 유혹하기 십상이다. 더 심각한 건 추억이 공유와 공감을 넘어 자칫 배제와 소외의 기제로 작동하는 경우다. 1년 전 이맘때 이른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는 저마다의 문화상품을 무기 삼아 일종의 ‘추억 전쟁’을 벌인 셈인데, 둘을 잇는 공통분모는 뭐니 뭐니 해도 ‘성취’다. 고생(가난)을 행복(풍요)으로, 억압(잿빛)을 자유(천연색)로 결국 바꿔놓은 자들만이 누리는 묘한 감정 말이다.

이대로는 성장이 아예 불가능하리만큼 우리 사회의 토양이 피폐해졌다고 한다. 성취와 성공, 성장이란 단어는 제 것이 아니라며 일찌감치 체념하는 사람도 빠르게 늘어만 간다. 특히 자라나는 청년세대일수록 훨씬 더하다. 아마도 그들은 추억조차 원천 박탈당한 최초의 세대일지도 모른다. 만일 기성세대의 추억 타령이 외려 자라나는 세대의 추억 씨앗을 무참히 짓밟는다면, 이제 추억은 불황기 자본의 꽃놀이패가 아니라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자본으로 불려야 옳다.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운다.’ 자본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듯이.

최우성 논설위원
최우성 논설위원
있기, 없기. 등장인물 또래의 사람들은 드라마를 지켜보며 정과 순수와 마을이 있었음을, 빈부 격차와 왕따와 취업 걱정이 없었음을 얘기한다. 잊고 지내던 옛 친구들을 떠올리며 연락하기 분주하다. 하지만 기껏해야 끼리끼리 공유와 공감에서 딱 멈춰선다면, 그건 이미 또 다른 배제와 소외의 첫걸음을 내딛는 꼴이다. 있기와 없기, 한마디로 갈라치기는 본디 자본의 존재방식이다. 외출과 대피가 이주와 탈출과는 엄연히 다르듯이 ‘그때, 우리’를 ‘지금, 우리’로 바꿔놓지 못하는 한, 오늘의 추억은 누군가의 미래마저 지배하는 견고한 자본덩어리일 뿐이다. 추억을 지닌 자와 추억을 박탈당한 자를 냉정하게 가르는 세상. 분명, 추억도 자본이다.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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