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발언 중에는 서로 충돌하는 게 종종 있다.
“이렇게 계속 국민이 국회로부터 외면당한다면 국민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이 엄동설한에 경제인과 국민이 거리로 나섰겠나. 지켜보는 저 역시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무겁다.”(19일 국무회의)
“거리로 나오는 집회 문화에서 탈피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부터 내려온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선동적인 방법은 결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도움이 될 것이 없다.”(25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두 발언은 모두 ‘거리로 나선 사람들’을 향한다. 결론은 정반대다. 앞의 발언은 국가기관으로부터 외면당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야만 하는 정당성을 설파한다. 뒤의 발언은 거리로 나서는 행위 자체를 비난한다. 국민이 정부로부터 끝까지 외면당할 때 거리로 나서라는 건가, 그러지 말라는 건가. 알 수가 없다.
두 발언은 서로 충돌할 뿐만 아니라 본말이 전도됐다. 앞의 발언은 ‘민생 구하기 입법 촉구 서명운동’을 언급한 것인데, 대통령과 재벌 사장님들이 앞장선 이 ‘황제 서명운동’은 대개 따뜻한 빌딩 안이나 온라인에서 진행되고 있다. 정작 “엄동설한”에 “거리로” 나선 이들은 누구인가. 북극의 한파가 서울을 점령한 24일 저녁, 인적마저 얼어붙은 소녀상 앞에서 수백명의 대학생들이 정부의 ‘12·28 위안부 합의’를 규탄했다. 젊은이들은 찬 바닥에 앉아 있었다. 정부의 ‘쉬운 해고’ 지침에 항의하는 노동자들도 그날 거리로 나섰다. 230일 넘게 고공농성 중인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경찰 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 농민 곁을 지키며 천막 농성을 이어가는 농민과 시민들은 그날도 칼날 같은 바람에 베이면서 한뎃잠을 잤다. 그 잠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몸이 떨린다. 그들은 “오죽하면” 그럴까. 지친 몸을 이끌고 무려 24년 동안이나 매주 수요집회를 열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심정은 “오죽하면”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을 지켜보는 대통령은 왜 서명운동에 나선 사장님들을 볼 때처럼 “안타깝고 마음이 무겁”지 않은 걸까.
거리에 나선다는 건 고통스러운 울음이란 사실을 이번 한파는 잘 보여줬다. 거리는 자기 뜻을 관철할 변변한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마지막 선택지다. 그래서 미국 헌법학자 에드윈 베이커의 말을 빌리면, “표현의 자유, 특히 집회의 본질적 기능은 지배적 다수에 대한 약자의 도전”인 것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발언 속에서는 그게 되레 지배자의 무기로 둔갑한다. 대통령과 재벌이 주도하는 집단행동은 칭송되고, 정부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선동”으로 몰린다. 정확한 주객전도다. 지배적 다수가 거리로 나서는 것이야말로 위험을 내포한다. 세상을 한 가지 색깔로만 칠하려는 ‘관제 운동’은 과거로부터 독재자들이 애용하던 “선동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왕국에서는 가장 큰 자와 가장 작은 자의 말이 똑같이 경청되고 존중돼야 한다.” 미국의 법관이자 철학자였던 러니드 핸드가 ‘자유의 정신’이란 연설에서 한 말이다. 권력자의 호오에 따라 누구의 말은 경청되고 누구의 말은 무시·억압되는 사회는 결국 모두가 같은 의견만 말하는 사회로 귀결될 것이다. 서명운동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동참할 테고 불법 집회나 혼란도 없을 테니, 좋은 세상일까. 그곳에 없는 한 가지, 자유가 그립지 않다면야…. 핸드 판사가 “법이 아니라 뭇사람들의 심장에 자리해야 한다”고 했던 그 자유 말이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박용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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