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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더 많은 여자들 / 권보드래

등록 2016-02-05 18:40

확실히 여학생 얼굴 익히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가 보다. 동료 교수 중 한 명은 여학생들이 천변만화하기 때문일 거라는 의견을 내놨다. 남학생들이 늘 똑같은 머리모양에 비슷한 차림새인 반면 여학생들은 머리도 복장도 자주 바뀌는 통에 알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가 싶기도 하다.

여학생들이 수업 중 말수가 더 적은 까닭일까. 토론 때 말문을 여는 건 주로 남학생들이다.

침묵의 권리를 존중하노라면서도 입 벌려 발언하는 쪽에 시선이 먼저 가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 방심에서부터 열렬한 호응까지, 침묵의 표정도 제각각인데, 여학생 중 상당수는 뜻밖에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다. 순응적이되 방어적이다.

한편으론 불쾌할 만큼 발랄한 게 요즘 젊은 여성의 이미지인데. 늘씬한 미모에 나날이 호텔이요 끼니마다 미식일 것 같은 아가씨들은 티브이와 인터넷에 넘쳐난다. ‘오빠, 감동’이라며 올린 각종 호화로운 이벤트와 마주칠 때마다 나도 심사가 뒤틀린다. 그런 순진한 과시에 노동을 회피하고 횡령한 자들의 쾌락을 겹쳐 보게 되곤 한다. 순진한 과시야말로 초라한 삶을 가리는 허영에 불과할 때가 자주 있을 터임에도.

여성은 근본적으로 약자다. 촌스럽게도 신체적 의미에서부터 그렇다. 딱 한번 남자와 대련을 해본 적이 있는데, 팔로 찌르고 막을 때 힘의 차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나는 여자치고 허우대가 큰 편이고 상대는 비둔해 뵈는 초보자였으나, 얕잡아보고 시작한 대련은 근육 마디마디 무력감을 남기고 끝났다. 힘으로써 대적해야 한다면 승산은 거의 없겠구나. 그런 물리력의 차이는 동물로서의 우리 존재 안쪽에 깊이 각인돼 있을 게다.

인류라는 종의 수백만년 세월이 없어질 수야 있으랴. 남성은 권력, 여성은 사랑이라는 이분법을 수긍케 될 때도 자주 있다. 내 앞에서 꿇으면 그뿐,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 아랑곳 않는 성품이 남성의 기본형이라면, 내게 어떻게 대하든 그 너머의 마음을 계속 탐색하는 습성은 여성의 기본형이다. “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 한마디에 폭력과 부당 대우를 견디는 여자들이 여전히 있는 건,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약자의 생존법이기 때문이다.

신체적 위력의 가치가 주변화돼온 수백년래 역사를 통해 암컷과 수컷 사이 관계가 어지간히 바뀌긴 했다. 더구나 지난 100여년 한반도에서 여성의 삶은 놀랄 만큼 달라졌다. 남녀평등이 시대착오적 구호처럼 들리게 됐을 정도다. 그럼에도 남성에 비해 여성의 표정은 비슷비슷하다. 자유롭게 자기를 느끼고 표현하는 정도가 훨씬 약하다. 타인의 시선에 속박되고, 인정받고 사랑받으려는 욕망에 묶이고, 위무하고 돌보라는 명령에 구속된다. 누구 말마따나 돌봄노동에 무관심한 여성은 늘 일종의 괴물이다.

명절 때 우리 동서 셋은 또 옹기종기 둘러앉아 전 부치고 만두를 빚을 게다. 시동생들이 설거지에 자주 나서고, 중고생 아들딸들이 거들기도 해서, 가사분담을 치레는 하는 그만하면 모범적인 관계다. 동서들은 따뜻하고도 미덥고, 사는 것도 다 그만한 의좋은 형제지간이다.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그럼에도 둘러앉은 나의, 동서들의 비슷한 표정 자체가 덫인가 싶을 때가 있다. 사납거나 건조하거나, 오연하고 자기중심적이거나, 묵묵하고 느릿했던- 나를 사로잡았던 여성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런 표정이 손 닿는 관계 안에 있다면 불쾌하거나 불편하겠지. 그럼에도 그들을 생각하다 보면 내 얼굴이 가면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젠 깊이 뿌리내려 잡아뗄 수도 없건만.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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