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말로 치면 ‘은따’였다. 어머니가 재직한 적 있는 중학교에 입학한 게 사달이었나 보다. 선생님들의 편애는 노골적이었고 교장선생님 손녀라는 헛소문마저 돌았다. “그러니까 좀 본받으란 말이야”, 교사가 이런 말을 남기고 퇴장하면 급우들의 눈초리는 으스스해졌다. 좀 특이했던 또 한 친구를 ‘저능아’라고 부르면서 “쟤는 기형아지” 하며 나를 가리키곤 했다.
저능아에 기형아라. 고작 십수 년 세상을 산 인생에는 가혹한 호칭이었다. 방금 뒷자리에서 “야, 기형아야” 하던 친구가 생글생글 웃으며 공책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러나 항변할 말이 없었다. 마침 한 반에 초등학교 때 노골적으로 왕따시켰던 동창마저 있는 터였다. 그 친구야말로 어찌 견뎠을까 싶은 것이, 자리를 비우면 급우들이 책상 서랍 속 물건을 동댕이치고 밟아대는 정도였으니까. 여럿이 깔깔대던 그 자리에 나도 끼어 있었으니까.
10대는 민감하게 출렁인다. 본격적으로 인간관계를 배우기 시작할 때고, 학교와 입시라는 제도가 그로테스크한 증폭 작용을 한다. 무리짓고 과시하고 살을 비비고 텃세 부린다. 혹은 주먹다짐을 하고 꿇리고 부려먹는다. 사회적 시선과 요구에 압박당하면서 불안해진 내면을 그런 식으로 풀어놓는다. ‘우상의 눈물’이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교실마다 있고 누구에게나 있다.
요즘 학교는 규칙투성이 정글이다. 체벌이 사라졌다지만 규칙은 훨씬 촘촘해져 숨통을 옥죈다. 숙제 하나까지 학교생활기록부가 감시하고 봉사와 여가마저 자유롭지 않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는 기분일 것만 같다. 차라리 단판 시험, 무조건 성적으로 줄 세웠던 시절이 그리워질 정도다. 깜박 방심하면 탈락이다. 애정 많고 욕심도 많은 부모는 혹여 자식이 미끄러질세라 맘을 졸인다. 그러다 보면 정글은 나날이 잔인해질 수밖에.
몇 해 전 아는 이의 딸이 학교폭력 문제로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그네 타는데 새치기한 친구를 세 명이 에워싼 후 윽박질렀다나. 다음날 부모가 학교에 찾아와 셋을 학교폭력위원회에 신고했다는 사연이었다. 1주일간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반성문을 써야 했단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가능성이 거론되고 약을 처방받으라는 조언까지 들었다고 한다.
세상이 강팔라질수록 내 새끼 보호하려는 심정은 절박해진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싶어 와락 감싸게 된다. 정글의 미로가 더해질수록 도사려 외부를 경계하게 된다. 다 귀한 생명이려니 싶다가도 누군가 내 자식에게 걸리적거리면 마음이 앙칼져진다. 내 자식만 중요하고 내 자식만 옳거니 싶다. 바로 어제도, 이건 너무하지 싶어 학교로 뛰어가고픈 마음을 가까스로 누른 참이다.
자식의 이해관계가 걸리면 갑자기 정의로운 투사인 척하다니. 다른 문제는 잘도 넘기면서.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폭력으로 얼룩졌던 내 10대 때 학교를 생각한다. 적잖은 숫자가 잡아먹혔을 그 만연했던 억압을 상기한다. 따지는 사람이 적었던 건 나라부터 시작해 관(官) 비슷한 건 죄다 두려웠기 때문일 테지. 거대한 거짓 정의가 사라진 후 지금은 자발적인 작은 정의들을 시험해 가는 과정이려나.
자식이란 본래 넉넉히 떼 놔야 하는 존재건만. 10대란 부모가 아니라 친구와 더불어 살기 시작해야 할 시기건만. ‘우상의 눈물’이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는 시대의 풍경뿐 아니라 성장기의 어쩔 수 없는 통증도 들어 있는 것이련만. 어젠 그래서, 뛰어나가고픈 걸음을 가까스로 주저앉히긴 했는데.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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