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부터 방송이 나왔다. 여분의 태극기를 준비해 두었으니 태극기를 미처 마련하지 못한 세대는 관리소를 방문해 가져가시기 바란다고. 국경일 바로 전날엔 아침과 저녁 두 차례에 걸쳐 방송이 나왔다. 내일이 삼일절이니 잊지 말고 태극기를 달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자고. 관리소에 여분의 태극기가 있다는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그 안내방송은 한 번 나올 때 두 번 연속 반복되었으니 하루에 네 번 울려퍼진 셈이었다. 방송은 당일 아침에도 나왔다. 잊지 말고! 잊지 말고 한 세대도 빠짐없이 태극기를 답시다!
아이들과 태극기를 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원래부터 달 생각이었지만, 빚쟁이처럼 여러 번 독촉받고 태극기를 달려니 왠지 억울했다. 애국심을 도둑맞은 기분이랄까. 철딱서니 없는 아이 취급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는데, 아파트 층층마다 태극기가 꽂혀 있는 게 보였다. 한 동 앞에 멈추어 서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집이, 정말로 한 집도 빠짐없이, 태극기를 달아놓았다. 수직으로 길게 뻗은 아파트에 일제히 달린 태극기를 보는데, 턱하니 가슴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흡사… 군대의 사열이 아닌가? 그렇게 일괄적으로 태극기가 꽂혀 있는 건 일찍이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한동안 아파트를 올려다보다가, 생각했다. 애국심. 그 친숙한 단어에 대하여.
아주 어릴 때부터 들어온, 특히 학교 같은 공공기관에서 끊임없이 들어온 그 단어가, 처음 들어보는 것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애국심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그렇다면 1) ‘나라’가 가리키는 대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살고 있는 이 땅?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역사’? 아니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2) ‘사랑하는 마음’은 어떤 것을 이르는가? 이 땅을 사랑하는 것? 이 땅의 역사를 사랑하는 것? 아니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그렇다면, 이 땅을 사랑하지 않은 나머지 마구 파헤쳤던 전직 대통령은 애국심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고 제 입맛에 맞게 짜깁기해 전승하려는 무리는 애국심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세월호 유족들과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들, 청천벽력으로 일터를 잃게 된 개성공단 임직원들을 사랑하기는커녕 투명인간 취급하는 현 정권의 실세들은 애국심이 있는가?
수직으로 줄줄이 꽂힌 태극기들을 바라보는데, 지난해에 광화문광장에 대형 태극기를 영구 게양하는 문제를 놓고 관계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거세진 바람에, 아파트에 꽂힌 태극기들이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내며 나부끼기 시작했다. 제각각 열심히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국기를 달았을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했다. 누군가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곱씹으며 기쁘게 국기를 달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방송이 자꾸 나오니까 별생각 없이 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나처럼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겼다 돌려받는 듯 찜찜한 마음으로 국기를 달았을 것이다. 나는 태극기가 한 집 건너 몇 집씩 자연스럽게 달려 있던 때의 나를 생각했다. 독촉받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국기를 달던 때의 나를. 그리고 국기 게양이나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형식적 절차 외엔 다른 어떤 애국심도 생각해낼 수 없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꽂혀 끈질기게 펄럭이고 있을 음습한 자격지심을.
정아은 소설가
정아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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