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그렇게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자로 낙인찍은 유승민 의원을 새누리당이 쫓아냈다. 후안무치가 놀랍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대구라서 그럴 것이다. 박 대통령은 대구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것 같다.
새누리당 공천 ‘비박 학살’이 한창이던 3월15~17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의 대구·경북 지역 새누리당 지지도는 70%였다. 1주일 전 61%에서 9%포인트 뛰었다. 대통령 직무 긍정 평가는 66%에서 57%로 줄었는데 여당 지지도는 오히려 상승했다.(중앙선거여론조사 공정심의위원회 누리집 참조)
해석이 쉽지 않다. 공천 학살 가해자인 박 대통령 지지 강도는 약해졌지만 실제로 선거에서 패배해 박 대통령이 곤경에 처하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지지층을 결속시켰을 것이다.
대구·경북은 왜 박 대통령을 맹종하는 것일까. “불쌍하다.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 그럴 것이다. 박 대통령의 피해자 코스프레는 감성을 자극한다. 위력적이다. 박정희 향수도 꽤 영향을 줬을 것이다. 그게 다일까?
박 대통령에 대한 대구·경북의 맹목은 이 지역 출신으로 서울에서 출세한 ‘티케이’들의 권력 중독, 그리고 이들 티케이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지역 유권자들의 일체감 때문인 것 같다.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놀랍게도 대구는 오랫동안 불의에 맞서 싸운 항쟁의 땅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 지역 사대부들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해방 직후엔 좌익이 강했다. 1946년 미군정 식량 정책에 항의해 대구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경찰이 총을 쐈다. ‘10월 항쟁’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 박상희가 이때 사망했다.
대구는 이승만 정권에 강력히 저항했다.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구는 무소속 조봉암 후보에게 70% 몰표를 줬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 학생의거’의 주역은 대구의 고등학생들이었다. 4·19 이후 교원노조 결성 운동이 시작된 곳도 대구였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지만, 대구는 싸웠다. 한일협정 반대, 삼선개헌 반대가 어느 지역보다 강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운동의 주역에는 경북고 출신들이 많았다.
변화는 1980년대 들어 시작됐다. 전두환 신군부 쿠데타의 핵심이 대구·경북 출신들이었다. 티케이들은 청와대 비서실장, 안기부장, 검찰총장 등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다. 중이 고기 맛을 보면 절간에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티케이들은 권력에 탐닉했다.
이들과 지연, 학연으로 연결된 지역 유권자들도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안기부, 기무사 등 공안기관은 대구 미문화원 폭발 사건(1983년) 등을 계기로 대구·경북에서 야당 세력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뿌리를 뽑았다. 5공·6공은 가히 ‘티케이 전성시대’였다.
중독이 심할수록 금단 현상도 고통스러운 법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집권 15년은 티케이들에게 극심한 고통의 시기였다. 그리고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이 들어선 뒤 걸신들린 것처럼 다시 권력을 탐하고 있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영주고), 김수남 검찰총장(청구고), 강신명 경찰청장(청구고), 임환수 국세청장(대구고),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경북고), 이완수 감사원 사무총장(대구고)이 티케이들이다. 인사 편중이 전두환·노태우 시절보다 더 심각하다. 그런데도 티케이들은 지금이 매우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개념이 없는 것인지 양심이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권력과 빵은 나눠야 한다. 독식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 공존의 지혜를 터득하지 못하면 왕따가 될 수밖에 없다. 신화로 묘사하면 이렇다.
“여왕은 도시에 권력을 풀었다. 권력에 중독된 사람들은 눈이 멀었다. 도시는 고립됐다. 좀비로 변한 사람들은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보좌한 김두우 전 홍보수석이 대구북을에 공천신청을 했다. 새누리당은 경선에도 올리지 않고 잘랐다. 자존심을 다친 그는 “모욕도 오래 참으면 버릇이 돼서 굴종이 된다. 권력의 오만을 심판해야 한다”고 외쳤다. 맞는 말이다. 대구·경북의 각성을 기대한다.
성한용 정치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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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성한용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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