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내놓은 대국민 메시지를 보면서 문득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가 떠올랐다. ‘침략’ ‘식민지 지배’ ‘사죄’ 등의 단어가 교묘히 배합돼 있지만 진솔한 사과와는 거리가 먼 아베 담화나, ‘민의’ ‘겸허’ ‘협력’ 등의 단어를 나열했지만 반성은 없는 박 대통령의 말이 판박이다. 아베 담화에서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주체가 생략된 것처럼, “국민의 민의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대통령의 말에서 생각의 주체가 빠진 것도 똑 닮았다. 양쪽 모두 ‘하고 싶지 않은 말’을 교묘한 화법으로 풀어내 초점을 흐리고 물꼬를 다른 쪽으로 돌리려 했다. 박 대통령이 총선 뒤 꼬박 닷새 동안 궁리해낸 것은 결국 국민을 상대로 한 ‘외교적 수사’였다.
유체이탈 화법의 달인이니 생략된 주체는 아마도 ‘우리 모두’일 것이다. 우리 모두 반성하고 민의를 되새기자는 물귀신 작전이다. 주체가 ‘나’라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민의를 한번 생각해보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나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박 대통령의 결론인 듯하다. 그런 대통령에게 더 무슨 기대를 걸고 어떤 희망을 말하겠는가. 이제는 그저 초라하게 몰락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언론에서 하이에나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 우리는 권력의 황혼이 도래했음을 안다. 총선 이후 보수언론들의 대통령 때리기가 가히 압권이다. 심지어 박 대통령을 향해 ‘총선 참패 5적’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박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를 놓고도 ‘반성하지 않는 대통령’이라는 매서운 질타가 쏟아진다. 모두 옳은 말씀이다. 하지만 문득 이런 질문이 솟구친다. ‘그러는 언론은?’
언론의 반성이 필요한 이유는 단지 총선 결과를 잘못 예측했다는 데 있지 않다. ‘오보’보다 더 큰 죄는 민심 ‘오도’에 있다.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탈북자 사건 보도에 열을 올린 ‘북풍 권언유착’은 한 예에 불과할 뿐이다. 총선보도감시연대 등 시민사회단체가 분석한 보수언론과 종편의 여당 편향 보도, 정치 혐오 부추기기 보도의 심각성은 이미 알려진 대로다.
단지 총선 보도만이 아니다. 보수언론들은 그동안 국가적 중요 현안에서 끊임없이 박 대통령의 오만을 부추기고 독주를 응원해왔다. 세월호 사건만 해도 유족들의 진상규명 노력에 정치적 색칠을 하면서 세월호특별법 제정이나 진상규명 위원회 활동에 계속 제동을 걸었다. 만날 개방과 경쟁을 외치더니 국사 교과서만은 폐쇄와 독점만이 살길이라며 박 대통령의 고집에 박수갈채를 보낸 게 바로 보수언론들이다. 야당의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 쏟아지는 시민들의 폭발적인 참여와 호응을 지켜보면서도 “야당은 테러를 한번 당해보고서야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킬 건가”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이런 눈에 뻔히 보이는 ‘민의’를 외면했던 언론이 이제 와서 민의를 말하니 쓴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수언론들이 요즘 박 대통령의 오만과 불통을 비판한다고는 하지만 실제 구체적인 알맹이는 별로 없다. 새누리당 참패의 원인도 현 정부의 누적된 정책적 실패보다는 새누리당 내홍과 막장공천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다. 박 대통령의 무한질주에 치어리더 노릇을 해온 처지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론이 현 정권의 오만과 불통을 나무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만과 불통의 결과물을 지켜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세월호특별법 개정, 테러방지법 전면수정, 국사 교과서 국정화 폐지 등의 사안에서 보수언론들은 여전히 권력 편을 들기 바쁘다.
이번 총선 결과가 의미있는 대목의 하나는 보수언론들의 전방위적인 공세가 예전과 달리 민심에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점이다. 당사자들만 그것을 모르고 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김종구 논설위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