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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울고 있는 아이 / 정아은

등록 2016-05-06 19:14수정 2016-05-06 19:14

노트북을 짊어지고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울고 있는 아이를 만났다. 언덕길에 있는 주택, 청포도색 단풍나무 잎과 흰색 철쭉이 장관을 이루어 평소에도 눈여겨보고 지나가던 집 앞이었다. 나를 본 아이가 “우리 할머니 못 봤어요?” 하고 으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얼른 뛰어가 아이 손을 잡아주었다. “자다 일어났더니 할머니가 안 계셔?” 물으니 “만화를 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없어졌다”는 울음 섞인 답이 돌아왔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해주었다. 머리 예쁘게 묶었네? 손톱 매니큐어 색깔이 정말 멋지다! 아이는 내가 던진 마지막 미끼, “근사한 반지를 꼈구나?”란 말을 덥석 물었다. “이거, 노란색도 있는데, 할머니가, 응, 이게 더 예쁘다고, 응, 이것만 끼라고, 응….” 언제 울었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말을 늘어놓는 아이. 쭈그리고 앉아 길게 이어지는 아이의 반지의 역사를 듣고 있는데, 이층 계단 꼭대기에 한 여성이 나타났다. 할머니라고 보기엔 너무 젊어 보여서 “저분이 할머니시니?” 물었더니 아이는 이미 몸을 돌려 할머니에게 올라가고 있었다.

“너 거기서 뭐 해!”

여성에게서 신경질적인 단말마가 나오더니 이내 날카로운 눈빛이 내 쪽을 향했다. 경계심이 뚝뚝 떨어지는 의심의 눈초리.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도서관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도와주려 한 거였거든요! 다시 돌아가서 말할까. 잠깐 동안 망설이다가, 그냥 도서관으로 향했다. 낯선 이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여성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하고, 그런 시선을 받았어도 기분이 크게 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서관 마당을 걸어 본관 건물로 향하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는 왜 어린아이만 보면 오지랖이 넓어질까? 평소에도 나는 어린아이를 보면 꼭 눈을 맞추고 웃어주거나 예쁘다, 귀엽다 한마디를 던져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본디 그리 살가운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올라옴과 동시에, 내 어린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어른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따꽁따꽁 말대꾸하고,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으면 성에 찰 때까지 “왜요?”라고 연거푸 물었던 나는 ‘약았다’, ‘되바라졌다’, ‘아이답지 못하다’는 말을 백만번쯤 들으며 자라났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따라오던 ‘괘씸해하는 시선’은 내 마음에 화인처럼 새겨져 두고두고 되살아났다. 물론 그런 나를 ‘똑똑하다’며 예뻐해 주는 어른도 있긴 했지만 그건 정말 가뭄에 콩 나듯 한 경우였다. 그리고 나는 드물게 만났던 그 어른들의 음성과 눈빛, 냄새가 지금까지 내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믿으며 질기게 살아오도록 만들었다고 굳게 확신하며 살고 있다.

정아은 소설가
정아은 소설가
그러니까 내가 그 아이에게 달려가 손을 잡고 웃어주었던 것은 내 안에 남은 내 어린 자아에게 보내는 일종의 기도 같은 것이었다. 차가운 어른들의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어린 자아를 달래주고 보듬어주었던 것. 나를 위한 행위였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긴다. 어른이 된다는 건 결국 주위 사람들의 영혼의 조각조각을 모아 자신의 영혼으로 완성해내는 일이 아닐까. 조금 전, 나는 아직 여물지 않은 아이의 영혼에 내 영혼의 따뜻한 조각 하나를 얹어준 것이다! 나는 내가 했던 행위를 마음대로 미화하고 과대포장하면서 도서관 문을 연다. 세상을 뒤덮은 색색의 철쭉에 환한 볕이 유감없이 쏟아져 내리는 화사한 봄날이다.

정아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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