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짊어지고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울고 있는 아이를 만났다. 언덕길에 있는 주택, 청포도색 단풍나무 잎과 흰색 철쭉이 장관을 이루어 평소에도 눈여겨보고 지나가던 집 앞이었다. 나를 본 아이가 “우리 할머니 못 봤어요?” 하고 으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얼른 뛰어가 아이 손을 잡아주었다. “자다 일어났더니 할머니가 안 계셔?” 물으니 “만화를 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없어졌다”는 울음 섞인 답이 돌아왔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해주었다. 머리 예쁘게 묶었네? 손톱 매니큐어 색깔이 정말 멋지다! 아이는 내가 던진 마지막 미끼, “근사한 반지를 꼈구나?”란 말을 덥석 물었다. “이거, 노란색도 있는데, 할머니가, 응, 이게 더 예쁘다고, 응, 이것만 끼라고, 응….” 언제 울었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말을 늘어놓는 아이. 쭈그리고 앉아 길게 이어지는 아이의 반지의 역사를 듣고 있는데, 이층 계단 꼭대기에 한 여성이 나타났다. 할머니라고 보기엔 너무 젊어 보여서 “저분이 할머니시니?” 물었더니 아이는 이미 몸을 돌려 할머니에게 올라가고 있었다.
“너 거기서 뭐 해!”
여성에게서 신경질적인 단말마가 나오더니 이내 날카로운 눈빛이 내 쪽을 향했다. 경계심이 뚝뚝 떨어지는 의심의 눈초리.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도서관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도와주려 한 거였거든요! 다시 돌아가서 말할까. 잠깐 동안 망설이다가, 그냥 도서관으로 향했다. 낯선 이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여성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하고, 그런 시선을 받았어도 기분이 크게 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서관 마당을 걸어 본관 건물로 향하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는 왜 어린아이만 보면 오지랖이 넓어질까? 평소에도 나는 어린아이를 보면 꼭 눈을 맞추고 웃어주거나 예쁘다, 귀엽다 한마디를 던져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본디 그리 살가운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올라옴과 동시에, 내 어린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어른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따꽁따꽁 말대꾸하고,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으면 성에 찰 때까지 “왜요?”라고 연거푸 물었던 나는 ‘약았다’, ‘되바라졌다’, ‘아이답지 못하다’는 말을 백만번쯤 들으며 자라났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따라오던 ‘괘씸해하는 시선’은 내 마음에 화인처럼 새겨져 두고두고 되살아났다. 물론 그런 나를 ‘똑똑하다’며 예뻐해 주는 어른도 있긴 했지만 그건 정말 가뭄에 콩 나듯 한 경우였다. 그리고 나는 드물게 만났던 그 어른들의 음성과 눈빛, 냄새가 지금까지 내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믿으며 질기게 살아오도록 만들었다고 굳게 확신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아이에게 달려가 손을 잡고 웃어주었던 것은 내 안에 남은 내 어린 자아에게 보내는 일종의 기도 같은 것이었다. 차가운 어른들의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어린 자아를 달래주고 보듬어주었던 것. 나를 위한 행위였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긴다. 어른이 된다는 건 결국 주위 사람들의 영혼의 조각조각을 모아 자신의 영혼으로 완성해내는 일이 아닐까. 조금 전, 나는 아직 여물지 않은 아이의 영혼에 내 영혼의 따뜻한 조각 하나를 얹어준 것이다! 나는 내가 했던 행위를 마음대로 미화하고 과대포장하면서 도서관 문을 연다. 세상을 뒤덮은 색색의 철쭉에 환한 볕이 유감없이 쏟아져 내리는 화사한 봄날이다.
정아은 소설가
정아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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