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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선희의 밑줄긋기] 그들이 한국을 함부로 대한 이유

등록 2016-05-12 20:40수정 2016-05-12 20:40

애초 기업의 사업구조나 조직구조를 좀더 효율적으로 바꾼다는 의미의 ‘구조조정’이 한국인들에게 ‘인력감축’과 동의어가 된 것은 외환위기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취업자 수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1963년 이래 전년대비 취업자 수가 감소한 것은 네 차례뿐이다.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이 있었던 1984년, 카드사태가 터졌던 2003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에 각각 7만6000명, 3만명, 7만1000명이 줄었다. 1998년에는 127만6000명이 감소했다. 당시 실업사태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얼마 전부터 구조조정이라는 단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오르내린다. 조선업에서는 이미 원청-하청-재하청 사슬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일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중국의 추격, 급격한 기술변화 등의 이유를 들어 구조조정이 조선·해운 분야를 넘어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생계를 위협당하는 노동자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고용안전망은 구멍투성이다. 가장 기본적인 안전망인 실업급여의 경우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 상당수가 아예 고용보험에 가입도 못하고 있다. 가입돼 있어도 실업급여를 받는 기간이 짧고(평균 3~4개월), 액수도 적다(퇴직 전 평균임금의 5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다.

구조조정이 더 본격화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정부, 정치권,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고용안전망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는 구조조정의 ‘불가피성’과 ‘시급성’만을 강조하는 주장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교수, 경제관료 등 소위 ‘전문가’들은 “경쟁력 없는 분야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무엇보다 기묘한 건 대통령과 정부의 태도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구조조정으로 밀려나는 실업자들이 파견법을 통해서 빨리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며 파견법을 실업대책으로 내세웠다. 10일에는 “공공기관 성과연봉제를 더이상 미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고용노동부 장관도 12일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성과연봉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찬반을 떠나 성과연봉제가 지금 노동분야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인지 의문이다. 고용부 장관은 아직까지 실업대책과 관련해 별도 기자간담회를 한 적이 없다.

스웨덴에서 직장을 잃으면 직전 임금의 최대 80%를 최대 15개월까지 실업급여로 받을 수 있다. 실업급여 대상이 아닌 청년, 노동자들도 현금지원(실업부조)을 받는다. 정부가 체계적인 직업훈련과 구직상담을 통해 실업자들의 재취업을 지원하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한국의 5배 수준의 예산을 쓰고 있다. 독일 정부는 ‘조업단축 지원금’ 제도를 통해 경기침체 시 기업이 노동시간을 줄여 고용을 유지하면 임금 일부를 지원해준다. 2009년 금융위기 직후 150만명의 노동자가 이 제도의 지원을 받았다.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얼마 전 한 다국적 기업에서 인력 구조조정 업무를 담당했었다는 이를 만났다. “호주 공장을 폐쇄하기로 결정됐는데, 폐쇄 시점 3년 전부터 프로그램을 짰습니다. 1년 동안 관리자들이 회사의 위기상황을 직원들에게 꾸준히 알리도록 했습니다. 폐쇄 2년 전에 공식 발표를 했고, 2년 동안 각 노동자 상황에 맞춰 전직을 위한 재교육, 훈련, 상담 등이 제공됐습니다.” 한국에서도 일부 공장을 폐쇄하게 됐다. “6개월 전에 발표를 하더군요. 좀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냐고 상부에 건의했지만, ‘한국은 원래 그렇게 하지 않나’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한국을 함부로 대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대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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