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 우러난 국물에 달걀이 스며들면 파의 청량감이 달걀의 부드러움과 섞여서, 라면은 인간 가까이 다가와 덜 쓸쓸하게 먹을 만하고 견딜 만한 음식이 된다….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 ‘라면을 끓이며’에 나오는 레시피의 한 구절이다.
그런데 컵라면은 라면이긴 해도 레시피라는 말을 끌어다 쓰기 어렵다. 심지어 ‘끓이다’라는 동사마저 컵라면은 감히 사용하지 못한다. 그저 끓는 물을 붓고 기다릴 뿐이다. 음식의 귀천과 상하계급을 굳이 따지자면 컵라면은 음식 사다리구조의 맨 밑바닥층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지하철 안전문(스크린도어) 수리용역업체 직원 사망사고 추모 공간에 햇반, 참치덮밥 등 컵라면보다 조금 윗길의 편의점 음식들이 수북이 쌓인 것도 아마 그런 연유일 것이다.
숨진 김아무개군의 가방에서는 컵라면과 함께 각종 공구류와 기름때 찌든 장갑도 나왔다. 그 나이 또래 청년들이 흔히 가지고 다닐 만한 물품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패너, 펜치, 드라이버, 니퍼 등에는 그의 어떤 꿈과 미래에 대한 설계가 녹아 있었을까. 비록 현재의 삶은 고단하고 팍팍하지만 이런 공구들로 인생을 닦고 조이고 기름치며 성실히 살다 보면 언젠가는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란 믿음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소박한 꿈은 채 피기도 전에 꺾였다. ‘컵라면과 공구류로 남은 청년’의 죽음은 그래서 우리의 가슴에 찬비를 내리게 한다.
집권여당의 원내대표는 이번 사건에 ‘불평등한 죽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간의 죽음은 모두를 공평하게 하는 게 아니다. 삶의 길이, 마지막 나날들의 질,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많은 사회·문화적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크리스티나 스타우트의 <불평등한 죽음>에서) 불평등한 죽음이 지닌 이런 본래의 뜻에 비춰 볼 때 보수 여당이 이번 사건을 불평등의 개념으로 접근한 것은 다소 뜻밖이다. 그런데 새누리당이 실제 펼쳐온 정책 기조를 돌아보면 이런 언어 사용은 자가당착이고 위선이다.
대한민국이 극도의 위험 사회가 된 것은 개인과 조직의 안전불감증 탓만이 아니라 효율성과 시장 지배를 앞세운 신자유주의적 국가 경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늘 새누리당이 있었다. 새누리당은 잊었는지 모르지만 ‘공기업 선진화’를 몰아붙여 인력 감축과 외주화의 광풍을 불러온 것은 바로 전임 이명박 정부다. “대부분 외주업체는 최저가 낙찰단가에서 이윤을 남기기 위해 저숙련, 저임금, 비전문 비정규직을 채용할 수밖에 없으며 필연적으로 안전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지난해 10월28일 ‘신자유주의의 안전위협과 운수노동자의 대안 국제심포지엄’에서 사회공공연구원의 이영수 연구원)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를 통해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야 3당이 추진하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 국회 청문회를 검찰 수사 중이란 이유로 반대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다. 꽃 같은 청춘들이 떼죽음을 당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노력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다 기어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중단시킨 것을 생각하면 쓴웃음마저 나온다. 아마도 중앙정부는 이번 사건에서 비켜나 있어 별 부담이 없는데다, 야권의 잠재적 대선주자인 박원순 서울시장을 흠집 낼 기회라는 정치적 계산도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좋다. 국회 진상조사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그래서 공기업 선진화의 공과를 비롯해 사건의 근인과 원인을 진단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할 좋은 기회다. 덧붙여, 박근혜 정부가 추진 중인 노동관계법 개정이 비정규직 양산 등으로 ‘불평등한 죽음’을 부추길 가능성에 대해서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모든 것을 떠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고단한 삶으로도 모자라 어이없는 죽음까지 맞는 불행한 청춘들이 더는 생겨나지 않아야 할 일 아닌가.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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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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