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27세. 운전사. 집행유예 기간 중 사고를 내 기준으로는 석방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나… 한 젊은이의 장래와 그에 연관된 숱한 사람들의 생애가 사고로 인해 간단히 아무렇게나 짓밟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관행이나 사무처리상 편의가 한 인간의 전 생애보다도 우선되어선 안 된다는 의무감.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아직도 낯선 검찰청의 여러 방들을 쩔쩔매며 돌아다니게 만든 것 같다.” 그래서 “몇 차례 담당검사 부장 차장검사 선에까지 절충을 하여 석방결재를 얻어냈다.”
1981년 12월13일 검찰 시보 조영래가 남긴 일기다. 20여년 만에 그의 생애가 담긴 책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를 다시 뒤적인 것은 ‘50억 수임료’가 보도된 날이었다. ‘정운호 게이트’의 와중에, 문득 그윽하게 미소 짓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때가 아니더라도 가슴 한켠에 남은 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가끔 되살아나는 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전태일 평전>으로 상징되는 사회운동가이자 문필가이기도 했지만, 역시 변호사로서 그의 족적은 남다르다. 성고문 사건 등 시국사건뿐 아니라 망원동 수재민, 상봉동 진폐증 주민, 조기정년 여성 전화교환원 등 약자 편에서 한길을 걸어왔다. 2004년 모교인 서울법대에 이어 올해 3월 서울지방변호사회가 광화문 건물 10층에 다시 조영래홀을 만든 것도 ‘인권과 사회정의’를 추구했던 그의 정신을 잇겠다는 다짐이었을 것이다.
생전에 그가 주도해 만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변호사들은 최근 <촛불백서Ⅱ>를 펴냈다. 2008년부터 최근까지 8년간 변호사 83명이 1398명의 촛불 시민을 접견하고 939명을 무료 변론한 기록이다. 세월호 참사 현장, 노동현장을 비롯한 곳곳에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 편에서 묵묵히 조영래의 길을 가고 있는 후배들이 아직 많다.
삶의 궤적은 달라도 정운호 게이트의 변호사들 역시 초년병 시절엔 시보 조영래처럼 정의의 사도를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돈맛을 알았는지 몰라도 건당 50억원에 100여채의 원룸 투자는 해도 너무했다. 퇴임 이후 500건 안팎 수임했다는 소문이 맞는다면 3일에 1건꼴이다. 기록을 읽어볼 수도 없었을 테니 정상적인 변론일 수가 없다.
굳이 ‘정운호 게이트’가 아니라도 요즘처럼 법조 전반에 대한 불신이 심각한 적도 없다. ‘전관예우’와 ‘유전무죄’를 두 축으로, 고시 선후배가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비리를 키워온 그들만의 리그가 된 지 오래다. 권력의 외압에는 약하면서 기득권을 챙기는 데는 일사불란한 판검사들, 인권과 윤리는 팽개치고 거액 수임료의 노예가 된 전관 변호사들까지. 국민적 신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대형 법조 비리는 이제 백약이 무효인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검찰이 두 전관 변호사를 구속했지만 현관들까지 찾아내 ‘예우’의 뿌리를 뽑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힘들다. 벌써 당시의 검사장 차장검사는 수사 선상에서 제외한다니 누가 납득하겠는가.
1997년 의정부, 1999년 대전, 2005년과 이듬해 서울 등 전국 곳곳에서 법조 비리가 터질 때마다 법원 검찰은 수사하고 윤리강령을 강화해왔지만, 전관예우 관행은 여전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유전무죄’라고 믿고 있다. 이번 사건도 결국 특검으로 갈 테지만 언제까지 특검으로 때울 것인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라도 진작 만들었다면 엄연한 직권남용과 뇌물수수를 전관예우 ‘관행’으로 포장해온 악습도 덜하지 않았을까. 조영래와 그 후배들이 그립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김이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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