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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호통소리 / 정아은

등록 2016-06-03 18:53수정 2016-06-03 21:36

버스에 올라서는데 커다란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미리미리 준비했어야지! 떠들고 놀다가 탄 다음에 돈을 찾으면 어떡해!” 놀라 가만히 서 있다가, 나를 향한 소리가 아님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버스 기사의 호통이 향한 곳은 앞서 버스에 오른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었다. 중학생쯤 돼 보이는 그들은 당황한 얼굴로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다. 순서를 기다려 교통카드를 찍고 안으로 들어가다가, 꼭 쥔 내 손에 땀이 차 있는 걸 발견했다.

세 정거장쯤 갔을까. 다시 한 번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용히 좀 해! 사람들 많은 데서 왜 이렇게 떠들어!” 서 있던 자리에서 고개를 돌려 그 소리의 수신자를 찾아보았다. 기사석 맞은편 창가에,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며 새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학생들로 가득 찬 버스. 남학생들은 남학생들대로 여학생들은 여학생들대로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실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조금 뒤 학생들이 우르르 하차하고 버스에는 성인들만 남았다. 나는 운전석 맞은편에 난 자리로 가 앉았다. 기사분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귀의 반을 덮은 반백의 머리카락 밑으로 드러난 검붉은 피부, 찌푸린 듯 가늘게 뜬 눈, 굳게 다문 입술 주위로 하얗게 피어난 버짐. 풍요롭거나 여유로운 인생을 살았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는데, 한 무리의 기억이 후려치듯 뇌리를 강타했다.

그것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몸부림치며 지나갔던 내 생의 마디마디에 대한 기억이었다. 십대 때는 여기저기서 호통을 들으며 울분을 느꼈고(저쪽에 서 있는 남자애들은 욕까지 하면서 더 크게 떠들었는데 왜 우리한테만 소리를 지르지?), 이십대 때는 그동안 겪었던 일들의 근원이 남성중심주의라는 거대한 틀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분노했으며, 가부장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된 삼십대 때는 사방에 촘촘히 깔린 대리효도 사상에 포박되어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가망 없는 사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과 논쟁하고, 인신공격을 받고, 버림받고,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폄하되었다.

그 첨예하고 뜨거운 절망이 가라앉은 것은, 내 안에 연민이 싹트면서부터였다. 사십대가 가까워지던 어느 날. 그동안 가해자라고 생각했던 이들, 그러니까 대다수의 남자들, 혹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틀을 그대로 내면화해 순종적으로 살며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것이 ‘우주의 미덕’인 양 따르길 강요하는 여자들의 이면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남자다움을 고수하기 위해, 혹은 ‘여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희생했던 수많은 인간적인 특성들이 그들의 내면에 고스란히 남아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키는지를 지켜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이들도 행복하지 않구나. 어떻게 보면 나보다 더… 불행하구나.

정아은 소설가
정아은 소설가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좁은 공간에 앉아 미세먼지가 실시간으로 뿜어져 나오는 대도시의 도로를 헤치고 나가야 하는 기사분의 일상을 생각했다. 성인이나 덩치 좋은 남학생들에게는 차마 못하고 나이 어린 여학생들에게 소리지르는 것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방출하며 그가 느꼈을 해소감을. 그리고 생각했다. 갑자기 내려치는 남자 어른의 고함소리에 놀라고 당황했을 여학생들의 마음을. 지금까지 그들이 겪어왔을 억울함,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수많은 가짓수의 억울함들을. 약자가 약자를 공격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기 일쑤인 우리 사회 부조리의 편리한 분출을.

정아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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