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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선희의 밑줄긋기] 죽거나 다치거나 쫓겨나거나

등록 2016-06-09 20:45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승강장 9-4 주변에 붙어 있는 수천장의 포스트잇,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 중 숨진 열아홉살 하청노동자 김군을 위한 슬픔과 분노가 저마다의 표현으로 적혀 있는 포스트잇들 사이에 7명의 사망자 명단이 붙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16년 5월11일 위씨(30) 추락사, 4월18일 노씨(37) 굴삭기 부품 사이 끼여 사망, 3월19일 서씨(44) 바다 빠져 익사….”

올해 들어 현대중공업 계열 조선사에서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이다. 5명은 사내하청 노동자였다. 이들과 김군의 죽음은 놀랍게, 또는 전혀 놀랍지 않게, 닮아 있다. 생전의 임금차별과 고용불안, 죽은 뒤 원청의 책임회피까지.

김군의 죽음이 드러낸 외주화의 민낯에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놀랐지만, 사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오래전부터 진행돼오던 일들이다. 조선산업은 그 모순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조선업 사내하청은 1970년대부터 있었지만, 지금 같은 양태는 아니었다. 초기에는 원청의 관리능력 부족 탓에 사내하청을 썼다. 1980년대까지 원청과 하청 노동자는 “월급봉투 색깔만 달랐을 뿐” 임금이나 노동조건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달라졌다. 회사는 인건비를 줄일 수 있고, 불황 때 쉽게 자를 수 있고, 안전문제에 아무 책임을 안 져도 될 존재가 필요했다. 원청노동자(정규직) 또한 자신들의 고용안정을 위해 회사 쪽에 협조했다.(박종식, ‘내부노동시장의 구조변화와 재해위험의 전가’)

그 결과 1990~2014년(9개 조선사 기준) 원청노동자가 3만4701명에서 3만5434명으로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이, 하청은 7580명에서 12만2788명으로 늘어난다.

하청노동자들은 임금만 낮은 것이 아니다. 힘들고 위험한 작업을 떠맡긴다. 생산비를 낮추려고 공정기일도 짧게 준다. 구조적으로 사고를 부추기면서도, 하청업체에서 산재가 2~3번 일어나면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 원청의 이미지가 나빠지고 정부 감독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이 막힌다. 결과는? 산재의 은폐다. 심지어 중상을 입은 노동자를 (기록이 남는) 119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자재 나르는 소형트럭에 실어 병원으로 옮기는 일이 일어난다. ‘세계 1위 조선업’은 이렇게 이룩한 것이다.

정부가 8일 조선업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6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대부분 하청노동자일 것이다. 조선소에서는 ‘죽거나 다치거나 쫓겨나거나’ 셋 중 하나라는 말이 떠돈다.(허환주 <현대조선잔혹사>)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말을 빌리면, 불평등한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세가지 관념이 있다. 첫째, 상위 1%(때로는 상위 10%)에게 이로운 것이 나머지에게도 이롭다. 둘째,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는 자신들 때문이다. 셋째, 또다른 세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군의 죽음은 백가지 이론보다 설득력 있게 첫째와 둘째 관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줬다. 그 누가 그의 죽음 앞에서, 그의 가방 속 사발면과 스테인리스 숟가락 앞에서, 기업이 잘돼야 노동자가 잘되는 거라고, 성장만 하면 국민 모두 잘살 수 있다고, 네가 노력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그러니 이제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마지막 관념을 깨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만든 세상이니 인간이 바꿀 수 있다는 진실을 직시하는 것.

그래서 포스트잇 하나하나가 다 가슴에 들어왔지만, 그중 한 문구에 유독 눈길이 갔던 것이다. “반드시 이 문제를 꼭 해결할게!”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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