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독립기념관장 명색이 민주공화국이라는 나라에서 교과서를 그것도 역사교과서를 음침한 밀실에서(아니면 고급 호텔에서), 정보기관원이 아닌 교수 또는 교사라는 사람들이 도둑고양이처럼 숨어서 쓴다고 한다. 교과서를 일컬어 교본(敎本)이라 함은 교육의 본바탕이 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본바탕이 되는 교과서를 어떤 사람들이 쓰는지, 그들을 어떤 기준으로 누가 선발했는지를 숨기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왕조실록>은 엄격한 원칙 아래 당대 최고의 선비들 가운데 선발한 사관들에 의해 집필되었다. 정부는 국정교과서 편찬이 당당하다면 왜 편찬기준과 집필자 명단을 7개월째 공개하지 않는가?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인사들은 각자 소신이라면 왜 당당히 나서지 못하는가? 교과서 국정화 전환 자체가 반역사적이고 역사학계 절대다수가 반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작업, 그것도 교과서를 쓰는 막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누군지를 밝히지 않는 것은 범죄행위에 가깝다. 정보기관이나 범죄수사를 맡은 경찰의 익명성은 역할의 특수성이 인정되지만 책 중에서도 교과서, 그것도 역사교과서를 집필하는데 익명으로 하는 것은 어떤 이유·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조지 오웰) 그래서 못된 짓을 하거나 업적이 없는 권력자는 역사를 왜곡·날조한다. 또 지배권을 영속화하기 위해 특정 사실을 변조한다. 조선을 강탈한 일제가 가장 먼저 서두른 것은 조선사편수위원회(조편위)를 만들어 한국사를 왜곡·날조한 일이다. 그때 만든 한국사는 오늘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교본이 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총독부의 조편위가 아니다. 국가기관이 역사교과서를 편찬하면서 편찬기준도, 집필자도 공개하지 않은 것은 조편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적어도 ‘국사’를 편찬하는 기관(장)이라면 당대의 권력보다 ‘역사’를 의식해야 하지 않을까. 청나라 말기 <고사구침론>(古史鉤沈論)을 쓴 학자 공자진은 “그 나라를 멸망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그 사(史)를 제거하라. 그 문방(文坊)을 허물고 기강을 파괴하려면 먼저 그 사를 제거하라. 그 인재를 단절시키고 교육을 근절하려면 먼저 그 사를 제거하라”고 역사의 권능을 높이 평가했다. 일제가 조편위를 만든 것, 박정희가 유신교과서를 만든 것, 박근혜 정부가 교과서 국정화의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모두 역사를 권력에 종속시켜 입맛대로 조작하기 위해서다. 선인들이 나라는 망해도 역사만 지키면 다시 부흥할 수 있다는 ‘역사정신’과는 딴판이다. 역사교과서 집필에 참여하고 있다는 46명(추정)의 복면 학자들과 국정교과서 편찬을 총괄한다는 국편에 전한다. 병자호란 후 ‘대청황제공덕비’에 어쩔 수 없이 선발되어 비문을 쓴 한성판윤 오준은 후일 수치심에서 벼슬을 버리고 붓을 잡았던 오른손을 돌로 찍어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데이비드 왓슨 노블은 <역사를 버린 역사가들>에서, 유럽의 낡은 인습과 권력종속 따위를 피해 신대륙(미국)으로 건너간 학자들이 유럽의 유산을 그대로 답습한 행태를 분석했다. ‘역사를 버린 역사가’들이 역사를 집필하고 편찬한다면 어찌 될까. 정책의 오류나 실수는 바로잡으면 되지만 교과서는 최소 한 세대의 정신사를 지배한다. 더욱이 교과서는 개인의 사설이 아닌 학계의 통설을 엄격한 기준과 검증을 거쳐 기술하는 고도의 학문적 결실이어야 한다. ‘복면의 기사’들이 밀실에서 권력이 제시한 지침으로 깜깜이 집필을 하는 것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 야3당은 지난 총선 공약으로 국정교과서 폐기를 다짐했다. 20대 국회의 첫 대정부질문이 시작되었다. 국민이 지켜본다.
이슈국정교과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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