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출신으로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을 지낸 다니엘 튜더의 경험담이다. 몇 년 전 한 장관이 주최한 외신기자 초청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대회가 화제에 오르면서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가 물었다. “왜 많은 한국인이 북한을 응원하는지 궁금하다.” 그 장관은 대뜸 “공산주의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한국에 얼마나 많은 종북세력이 들끓고 있는지를 5분 동안 열을 올리며 이야기했다. 특히 386세대를 콕 집어 종북세력의 핵심이라고 말하며 “386세대와 386정신이 사라지면 우리나라는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386세대에 투표권이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노조가 허용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모두 해체해버리고 싶다” “386세대와 마찬가지로 노조 역시 나라에 백해무익한 존재”라는 말도 했다. 튜더가 쓴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그 장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핵폭탄급 발언들이다. 교육부의 나향욱 정책기획관과 차이점이라면, 한국 기자들이 아닌 외국 기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였고, 그 발언이 기사화되지 않았다는 점 정도다. 이 예화를 통해 확인되는 사실은 분명하다. 첫째, 지금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정부 고위직 인사들의 왜곡된 사고와 철학은 단지 나 기획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그들은 한국 언론인들 앞에서는 나름대로 발언에 조심하지만 실제 속마음은 ‘상상 이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외국 언론인 앞에서는 오히려 절제되지 않은 본심을 털어놓은 것이다. 더욱 분명한 사실은 이런 이념과 철학이 국가를 움직이는 기본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이다.
나 기획관이 설파한 ‘민중 개돼지론’과 ‘신분제 공고화’ 신념은 단지 고교 서열화나 현대판 음서제인 로스쿨 문제 등 교육 현장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엊그제 광복절 특별사면 방침을 밝히면서 비리 경제인 사면 계획을 내비쳤다. 명시적으로 말만 하지 않았을 뿐 “비리 경제인을 용서해야 경제가 살아나고 법치주의를 허물어야 백성들이 먹고살 거리가 생겨난다”는 말을 대통령이 앞장서 한 것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남루한 현실을 씁쓸하게 바라보는 서민들의 심정은 안중에 없다. 결국 “개돼지는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 어차피 평등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나 기획관의 말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 대한 가혹하기 짝이 없는 형사처벌을 보면 개돼지론과 신분제의 강고한 벽은 더욱 확연해진다. 노동자는 현대판 노비다. 노비의 반항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신분적 차별과 임금 차별의 악화에 반기를 든 것은 ‘노비의 난’이다. 개가 왈왈거리고 돼지가 시끄럽게 꿀꿀거리는데도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은 주인의 직무유기다. 때려서 버릇을 고치고 주인의 위엄을 세워야 한다는 굳건한 믿음은 검경뿐 아니라 일부 판사들한테도 폭넓게 퍼져 있다. 징역 5년형의 중형 선고가 이를 웅변한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민중 개돼지론’과 ‘종북좌파론’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라는 점이다. 앞서 말한 장관의 확고한 신념처럼, 기존 질서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회의 변혁과 개선을 요구하는 움직임은 그들에게는 모두 종북주의자들의 소행이다. 신분제 사회에 대한 통렬한 외침인 ‘헬조선’도 마찬가지다. 북한을 ‘헬북’으로 부르지 않고 남한(그들 생각에는 거의 천국 수준인 나라!)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자학이요, 종북적 언사다. 이런 불온한 언어를 쓰는 자는 지옥(북)으로 보내야 한다. 이런 식의 주장은 단지 일부 극우 논객들의 편집증적 사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청와대, 여당, 검찰, 사법부 등 현재 나라를 움직이는 상위 1% 출신 인사들의 마음속에 은밀히 박혀 있는 신념이다. 튜더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 그 장관과 유사한 사고방식을 가진 지도급 인사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비밀스러움을 좋아하고 비판이나 의문 제기에 적대적이었으며, 그러한 태도를 당연한 권리로 여겼다.”
교육부는 막말 파문을 빚은 나 기획관을 파면할 방침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개돼지들과는 다르다. 시간이 흘러 파문이 잦아들면 상위 1% 출신답게 나름대로 좋은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오히려 조심해야 할 사람들은 개돼지론에 분노하는 민중들이다. “나 기획관을 파면했는데도 계속 사건을 문제 삼고 과도하게 논란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다”라는 반격이 언제 가해질지 모른다. 세월호 사건도 그랬고, 위안부 협상 문제에서도 그랬다. 그것이 상위 1%가 지배하는 나라의 속성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늦기 전에 속 시원히 크게 한번 외쳐나 보자. 왈왈! 꿀꿀!
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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