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싱클레어> 편집장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적응기간이 필요하다고 하길래 하루하루 아이와 함께 적응해가고 있다. 5일째에 접어들자 저녁에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38도가 조금 넘었다. 해열제를 먹이기에는 애매한 체온이지만 엄마는 서로의 편안한 수면을 위해 약을 먹이기로 했다. 아이는 안 먹겠다고 발광을 하다가 급기야 ‘토하고 기절할 듯한 연기’를 보였다. 오랜만에 엄마 아빠는 기분이 상해 아이에게 말도 붙이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또 기절 연기를 시작하려는 기미가 보여 하루 어린이집을 쉬기로 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보니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새삼 대단하다. 오전에 등원한 아이들 간식 먹이고, 씻기고, 기저귀 챙기고, 이런저런 놀이 후 밥 먹이고, 재우고, 또 간식 먹이고, 거기다 부모와의 면담까지.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반 아이들까지 돌보다 퇴근하신다. 우리는 낮에 시간을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부모이기에 어린이집 회의에도 참석하고, 공개수업에 참여해 아이들과 노래도 부르고, 운영위원회까지 참석하다 보니 자연히 어린이집 살림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선생님들의 월급은 최저임금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이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정성을 다하는 분들을 계속 보고 있으니 그것도 마음이 힘들다. 이 정도 되면 ‘기절’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참고 적응하는 데 익숙한 우리들은, 결국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지울 수밖에 없다. 아이를 키우면서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알아서 해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영화는 집에서 케이블로 보고 산책은 동네 골목으로 만족한다. 애착관계 형성이 중요한 시기라고 하니 딴생각 말고 육아에 전념해야 하는 것도 부모의 몫이다. ‘독박육아’라는 말은 부모들의 신음소리가 만든 말이다. 혼자 일해야 하는 직업이 늘어났다. 홀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홀로 지하철역 곳곳을 다니고, 홀로 간신히 전신주에 매달려 일하고, 홀로 건물 계단을 오르내리며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두 명이 하던 일을 혼자 한다고 월급이 두 배가 되는 건 아니다. 인건비 절감이 목적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렇다 보니 최소한의 인원이 위험한 일들에 투입된다. 왜 그런지 늘어나는 건 일뿐인 현실이다. 모두들 홀로, 외롭게 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고 그렇게 도시에서 견디며 살아간다. 생각해보니, 아이 입장에서는 기절 연기가 모양이 좀 빠지기는 하지만 성공적인 전략이었다. 하루를 넘기기는 어려웠지만 어쨌든 숨돌릴 시간은 번 셈이다. 부모 입장에서야 반갑지 않은 일이지만, 때로는 모양이 좀 빠지더라도 기절할 듯한 연기가 필요한 모양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위태위태한 삶을 살면서도 참고 견디고 혼자서 이겨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참 비현실적인 삶의 방식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방식을 학습해왔고 이제는 이런 방식이 더 이상 각자에게 해결책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신음소리를 내야 한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지금 우리가 얼마나 엉망인지를, 그리고 알고 보면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진짜로 기절하기 전에 기절 연기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하루 이틀 정도라도 숨을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자신의 위태로움을 신호로 보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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