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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남북한의 금수저와 ‘체제 동요’의 진실

등록 2016-08-24 18:23수정 2016-08-25 10:39

김종구

김정은 체제에 대한 염증,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동경, 자녀의 장래 문제. 통일부가 밝힌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 공사의 탈북 이유다. 앞의 두 이유야 늘 나오는 뻔한 이야기고, 눈길을 끄는 것은 마지막에 언급된 이유다. 태 공사는 전형적인 북한의 금수저 출신이다. 평생을 특권 계층 엘리트로 살아온 그에게 자녀의 학업과 장래는 ‘조국’을 배신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는가.

그러고 보니 북한의 금수저든 남한의 금수저든, 자녀의 장래 문제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유전자가 존재하는 것도 같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막내 처제는 딸을 외국인학교에 입학시키려고 국적 서류를 위조했다가 처벌을 받은 뒤 아예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동부에 있는 세인트키츠네비스로 국적을 바꿔 딸을 외국인학교에 넣었다. 외국인학교 입학을 위해 캄보디아며 싱가포르 시민권을 얻은 재벌가 아들딸들의 이야기도 익히 알려진 바다. 태 공사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북한 국적에서 남한 국적으로 변신을 시도한 것도 결국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면 국적 바꾸기도 불사하는 대목에서 남한과 북한의 일부 금수저들은 이미 위대한 통일을 이루었다.

태 공사가 일생일대의 중대 결심을 한 데는 자녀의 장래 문제 고민뿐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다른 진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금전 사고를 내서 이미 6월에 북한 소환령을 받은 상태였다는 보도도 흘러나온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국가 자금을 횡령하고 국가 비밀을 팔아먹었으며 미성년 강간 범죄까지 감행했다”고 비난했다. 사실 여부야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동안의 예를 보면 북으로 넘어간 남쪽 인사든 남으로 넘어온 북쪽 인사든, 체제에 대한 염증보다는 개인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나온 선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북한 엘리트들의 일회성 탈북을 북한 체제의 동요 증거로 들이대는 것은 성급해 보인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대목은 남한 정부가 태 공사의 탈북을 ‘남쪽 체제 동요 방지책’으로 활용하고 있는 점이다. 지금 ‘박근혜 체제’의 동요는 남 걱정하고 있을 처지가 못 된다. 각종 국정운영의 난맥상, 국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거진 ‘우병우 비리 의혹’ 등으로 사면초가의 위기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태 공사의 탈북은 가뭄 끝의 단비 같은 존재일 것이다. 박 대통령이 연일 “북한의 심각한 균열 조짐”이니 “북한 체제 동요 가능성”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며 ‘안보 프레임’으로 정국 돌파를 시도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북한의 체제 동요를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좁은 의미의 정치권력 체제 수호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더 넓은 의미의 남한 자본주의 체제 동요를 막는 좋은 방편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한탄하는 사람들에게 `보라, 북한이야말로 헬북 아닌가‘라고 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헬조선’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무조건적 자긍심’을 강조하는 박 대통령에게는 이런 호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태 공사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는 북한 엘리트들이 줄을 이어 탈북한다고 해도 남쪽의 상황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 절망하는 이 땅의 많은 흙수저들에게 북한 금수저의 탈북은 결코 위안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남쪽이든 북쪽이든 금수저들이 지닌 탐욕과 이기심의 동질성만 씁쓸히 확인할 뿐이다. 영국 공군기에 실린 태 공사의 골프 클럽과 테니스 라켓, 그의 아내가 그 급한 와중에도 영국의 대형마트 ‘마크스 앤드 스펜서’에 들러 좋아하는 물품을 잔뜩 샀다는 영국 언론 보도를 접하며 이 땅의 흙수저들은 무엇을 느낄까. 영국의 명문대에 입학할 예정이었다는 태 공사의 차남은 어쨌든 앞으로도 엘리트 코스를 밟을 것이다. 이 땅의 흙수저들은 북한 금수저 출신에도 못 미치는 처지를 곱씹어야 할 형편인 셈이다.

그러니 이 땅의 권력이여, 북한 체제의 동요를 앞세워 남쪽 체제의 동요를 막겠다는 환상을 버려라. 국민의 절망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지도자, 탈출구 없는 현실에 분노하는 젊은이들에게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운위하는 정치권력이 나라를 지배하는 한 ‘헬조선’은 여전히 헬조선으로 남을 뿐이다. ‘헬북’은 결코 헬조선의 치유제가 아니다. 취업 시장에서 낙오한 젊은이들에게 `탈남’을 권장하는 우리 현실에서 탈북 문제로 북쪽을 마냥 비웃을 수 있을까. 북한 주민들 사이에 체제 염증이 확산된다고 환호작약할 때도 아니다. 금수저 일탈의 전형인 일개 청와대 참모 살리기에 국가의 명운을 거는 이 땅에서도 ‘체제에 대한 염증’은 깊어져만 가고 있다. 이런 현실을 지금 당신들만 모르고 있다.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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