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승
논설위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0월 임시 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를 맡는다. 그는 2001년 삼성전자 상무보를 시작으로 경영에 참여했지만, 지금까지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등기이사를 맡은 적이 없다. 이번 등기이사 선임 결정은 막강한 권한 행사에 상응해 법적 책임을 지게 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국내 재벌 총수 일가 가운데 책임은 지지 않고 권한만 행사하려고 등기이사를 맡지 않는 경우가 많다. 등기이사가 되면 이사회 구성원으로 주요 의사 결정을 하고 그 결정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떠안게 된다. 보수도 공개된다. 2013년 등기이사의 보수 공개가 법으로 의무화되자 등기이사를 사퇴한 재벌 총수 일가도 있다.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이 등기이사 선임에 이어 연말엔 회장에 취임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으나,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부친인 이건희 회장이 의식불명 상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무리한 후계 승계는 득보다 실이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이 부회장의 등기이사 선임을 진작부터 준비하면서 시기를 저울질해왔다고 한다. 등기이사 선임은 후계 승계를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삼성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삼성 내부에선 2년 전부터 이 부회장을 등기이사로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그동안 망설여오다가 이번 ‘갤럭시노트7 사태’를 계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이 직접 책임지고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등기이사를 맡게 됐다는 그림이 자연스럽게 그려진 셈이다. 결과적으로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챙겼다.
이 부회장의 ‘조기 등판’ 명분이 된 갤럭시노트7 사태는 그에게 발등의 불이다. 세계 최초의 ‘홍채 인식 기능’으로 대박 조짐을 보였으나 그 뒤 배터리 화재 발생, 전량 리콜 발표, 추가 화재 발생, 사용중지 권고 등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세계적 이슈가 됐다. 국내외 소비자들의 신뢰를 되찾고 브랜드 가치를 지켜내는 일이 그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삼성의 가장 큰 고민은 삼성전자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내놓을 만한 사업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삼성에스디아이(SDI)는 갤럭시노트7의 배터리 결함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건설부문, 삼성엔지니어링 등 ‘수주 3사’의 미래도 불투명하고, 금융 계열사들의 사정도 녹록지 않다. 이 부회장은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 사실상 총수 역할을 해왔다. ‘선택과 집중의 원칙’을 내세워 화학과 방위산업 계열사 매각과 같은 대규모 사업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미래 성장동력의 발굴·육성에선 아직까지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사업 재편을 성공적으로 이뤄내야 하는 과제가 그에게 주어져 있다.
이 부회장이 시장과 사회의 요구를 경청하고 소통하면서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야당들이 경제민주화 차원에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지금까지처럼 수세적 입장에서 거부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어차피 유통기한이 이미 지난 황제경영 방식으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다. 이와 함께 반도체 사업장의 백혈병 문제나 삼성전자서비스 하청업체의 직원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병철·이건희 회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리더십을 구축해야 한다. 시장과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가야 하고, 그 결과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 경제개혁연대가 이 부회장의 등기이사 선임과 관련해 내놓은 논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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