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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여왕’께서 ‘머무신 곳’ / 김종구

등록 2016-09-20 17:55수정 2016-09-20 22:32

임금이 나들이하는 중간에 수레를 잠시 세워 머무는 것을 주필(駐蹕)이라고 한다. 남한산성의 동문 옆에 있는 제11암문을 나가 계곡 쪽으로 내려가면 기해주필(己亥駐蹕)이라고 새겨진 주필암이 있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기해년(1779년) 3월에 효종을 모신 영릉을 참배하고 나서 남한산성 행궁에 들렀다가 잠시 쉬었다 간 것을 기념해 광주유수인 김종수가 ‘기해주필 수어사신 김종수 봉교서’라고 새긴 데서 유래했다.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에 있는 ‘태종대’는 조선조 3대 임금 태종이 머문 것을 기념해 세운 건물인데, 표석에 주필대(駐蹕臺)라고 새겨져 있다. ‘함흥주필’은 태조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에 격노해 함흥으로 가서 은거한 것을 뜻한다. 태조의 마음을 달래려 보낸 사신이 모두 죽임을 당해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게 바로 ‘함흥차사’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중순 울산 대왕암공원을 방문하자 울산시가 이곳에 ‘대통령께서 걸으신 곳’이라는 안내문을 세웠다고 한다. 올해가 병신년이니 병신주필(丙申駐蹕)이라는 표지를 새긴 셈이다. “여왕께서 병신년 7월 하계휴가를 맞아 어가 행렬을 잠시 멈추시고 이곳에 들르시도다. 상(上)께서는 ‘자연이 잘 보존돼 있어서 다행스럽고 잘된 일이다’라고 말씀하시었다.”

임금의 대궐 밖 행차를 뜻하는 행행(行幸)이라는 말에는 ‘백성이 임금의 행차를 행복하게 여기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왕이 한번 행차하면 그 지역 백성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주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왕에게 억울함을 직접 글로 호소(상언)하기도 하고, 임금의 행차 중에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격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여왕께는 상언도 격쟁도 통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머물다 간 곳의 안내판은 조선 시대로 돌아갔지만 백성과의 소통은 그때만도 못한 듯하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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