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0월2일 국회에서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과 신직수 법무장관, 오치성 내무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표결이 이뤄졌다. 물가 폭등과 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 사건 책임을 묻기 위해 야당인 신민당이 3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제출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당인 공화당에 부결을 지시했다.
예상대로 김학렬·신직수 장관 건은 부결됐다. 그러나 오치성 장관 해임안은 가결됐다. 공화당에서 20표 정도의 이탈표가 나왔다. 1969년 3선 개헌을 주도한 공화당 4인방(김성곤·길재호·백남억·김진만) 중 길재호 사무총장과 김성곤 재정위원장이 대통령 지시를 어기고 휘하 의원들에게 찬성표를 던지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4인방은 오치성 장관이 자신들과 친한 시장, 군수, 경찰서장을 대거 교체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고 힘을 과시하려 했다. 쌍용 창업주인 김성곤 의원은 기분이 좋아 동료 의원들과 한양컨트리클럽으로 골프를 치러 갔다.
박 대통령은 격노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길재호·김성곤 일파를 다 잡아들이라고 지시했다. 한양골프장에 중앙정보부원 수십명이 들이닥쳤다. 김성곤 의원 등은 골프를 치다가 그대로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신경식 헌정회장(당시 <대한일보> 정치부 차장대우)은 “길재호·김성곤씨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위세가 셌다. 정보부에도 당연히 이들과 끈이 닿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후락 부장은 요원들이 이들을 봐주지 못하도록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조사실에 집어넣었다. 위에서 보고 있으니까 요원들은 경쟁하듯 국회의원들을 팼다. 김성곤씨는 콧털까지 뽑혔다”고 말했다. 길재호·김성곤씨는 정계를 은퇴했다.
해임건의안 통과에 불같이 화를 냈던 박정희 대통령도 국회 의견을 거부할 수 없어 결국 내무장관을 교체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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