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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사람 잘못 보긴 했지만… / 여현호

등록 2016-09-29 18:16수정 2016-09-29 20:48

여현호
논설위원

기자 생활 오래 하다 보니 사람의 어제오늘이 무상하다. 알던 검사들은 거의 퇴직했고, 기업 실무자도 임원을 마친 지 오래다. 어울렸던 국회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이가 많다. 그래도 현역이 꽤 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에겐 특히 감회가 남다르다. 옛 한나라당 대변인실 자료분석부장이던 그는 참 부지런했다. 누구보다 먼저 출근했고, 밤늦게까지 당사 구석에서 일했다. 주문이 뭐든 준비되어 있었고, 그 이상을 제공했다. 성실과 열정이 그만의 덕목은 아닐 것이다. 밤새 일하던 이는 그때도 많았다. 이 대표는 그에 더해 보스의 생각에 주파수를 맞추고 보스와 자신을 일체화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이회창 대표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던 그는 새 주군인 박근혜 대표에 대한 작은 비판에도 몸을 떨어가며 반박했다. ‘혼신’이란 말이 실감됐다. 호남 출신인 그가 ‘복심’이 된 이유다.

그런 이 대표가 28일 최근 정국에 대해 “이런 식으로 (대통령의) 무릎을 꿇게 하려 한다면 사람 잘못 본 것”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박근혜 대통령의 속내 그대로일 것이다. 대통령과 자주 통화한다니 실제 대통령의 말일 수도 있겠다.

아닌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박근혜라는 사람을 잘못 보긴 했다. 그가 외교·안보나 경제 등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다는 걱정은 진작부터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도무지 업적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 관계자는 이명박 대통령 때의 청와대에 대해 “대통령이 보고를 어느 정도 이해하면 담당 비서관까지 불러 몇 시간씩 프리토킹 회의를 하곤 했다”고 전했다. 참모와 장관들이 대통령 얼굴을 보기는커녕 측근 ‘3인방’을 통해 올린 보고서를 대통령이 읽었는지에 일희일비하는 지금과는 천양지차다.

위기 아닌 때가 어디 있겠냐마는 지금은 중요한 때다. 세계 경제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새 먹거리를 찾아 경제 체질을 바꿔야 하는 과제가 있다. 북한 문제는 통제는 물론 상황 관리조차 녹록지 않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슬기롭게 위치를 잡는 일도 순진한 기대와 단순한 구호로는 어렵다. 양극화와 인구구조 급변 속에서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적 활력을 유지하기에도 할 일이 산더미다. 그런데도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때보다 무력한 야당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저 일을 못 했을 뿐이다.

사람 잘못 본 것은 또 있다. 박 대통령이 정치 승부사인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싸움만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국정이야 어찌 되든 지지 않으려고만 한다. 신뢰를 잃은 수석이나 장관의 교체는 당연한데도 대통령은 이를 자신을 무릎 꿇리려는 음모로만 받아들인다. 레임덕 방지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당장의 싸움부터 지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대놓고 특별감찰관실을 솎아내 입을 막고, 약점을 잡아 ‘방해꾼’을 굴복시킨다. 정치의 룰이나 품격, 양식과 관행 따위는 아예 없다.

이 대표는 핵심 전투원이다. 당 대표면 지휘관이지만 안면 몰수의 이전투구 전투에선 소총수도 불사한다. 대통령에게 불리한 국면을 유리하게 바꿀 수만 있다면 일회성 총알받이라도 괜찮은 모양이다. 무릎 꿇지 않겠다는 생각은 퇴임 뒤까지 이어질 것이다. 박 대통령은 10·26 뒤 아버지의 부하들이 등을 돌린 데 대한 절절한 배신감을 토로한 바 있다. 그는 만사 제쳐놓고 레임덕과 배신을 막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다.

이런 대통령을 두고도 어떻게든 할 일은 해야 한다. 시절이 아무리 수상하더라도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라 세금으로 먹고산다면 더욱 그러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대통령도 곧 물러날 사람 아니겠는가.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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