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안선희의 밑줄 긋기] 누가 정말 ‘갑’이었을까

등록 2016-10-06 18:14수정 2016-10-06 20:41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나는 재벌들 안 만납니다. 만나면 ‘이해’하게 되거든요.”

경제 관련 정부위원회에서 일했던 인사를 몇년 전 인터뷰했을 때 들은 말이다. 이 말이 다시 생각난 것은 최근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시행 때문이다. “공무원들이 민원인 만나길 꺼리면서 민간과의 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말들이 나온다. 기자들은 “취재원에게 깊숙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어진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공무원이나 기자가 정책이나 기사에 관련 당사자들의 주장을 잘 듣고 반영하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소통’의 대상이 제한적이라면, 소통이 지나쳐 ‘동화’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 기자들 기사 쓰는 거 보면 기업 하는 사람들보다 더 기업 걱정을 많이 해.” 한 지인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언론의 ‘기업 편향성’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의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먼 교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권력과 부를 가진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해 뉴스를 걸러낸다고 말한다.(<여론조작>) 언론의 주요 수입원인 광고, 기업과 정부가 제공하는 정보에 대한 언론의 의존성 등이 주요 여과장치다.

한국 사회에서 정보 의존성은 기자실 제도와 접대문화 탓에 더욱 강화된다. 주요 재벌 대기업과 정부 부처에는 기자실이 있다. 기자들은 날마다 기자실로 출근한다. 출입처에서 보내주는 보도자료로 기사를 쓴다. 낮에는 조용한 방에서 같이 밥을 먹으며, 밤에는 떠들썩하게 폭탄주를 주고받으며, 주말에는 공기 좋은 골프장에서 나란히 걸으며, 공식자료나 브리핑에서 미처 못했던 말들을 건넨다.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만데요. ○○이 흔들리면 전체 경제가 흔들립니다.” “하청업체가 중간에서 안전예산을 떼먹고 하청노동자들이 안전수칙을 잘 지키지 않아서 산재가 나는 겁니다.” “생산직 노동자 월급이 얼마나 많은지 다들 자식을 해외유학 보낸다니까요.”

하청업체, 하청노동자, 생산직 노동자를 만나는 기자는 거의 없다. 언론뿐일까. 공무원들이 만났다는 ‘민원인’은 누구였을까.

기자들은 밥은 얻어먹어도 기사는 독립적으로 쓴다고 자신한다. 홍보업무를 했던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홍보맨들끼리 그런 말 해요. ‘기자들은 자신들이 갑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도 그런 척 대해주지만 사실 우리가 갑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만 주면 기자들은 대부분 그대로 쓴다.’” “기업이나 정부 관계자들을 저녁에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논리에 확 빠져들게 되더라고요. 그 시간에 논문이나 자료를 보는 게 낫겠다 싶어 요즘은 잘 만나지 않아요.” 한 후배 기자의 말이다.

기득권층이 언론에 각종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일상적인 뉴스 소스가 될 때, 그럴 자원이 없는 층은 언론에 접근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해야 한다.(<여론조작>)

지난 8월 저임금과 성추행에 항의하며 삭발식을 했던 김포공항 청소노동자 노조의 손경희 지회장은 “기자들 오게 하려고” 삭발을 했다고 말했다. 손 지회장이 지난달 초 원청인 한국공항공사 쪽에 대화를 요구하며 단식을 했을 때 그를 찾아갔다. 그는 공사 건물 앞 버스정류장 옆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햇볕 가릴 천막도 없었다.

한국공항공사에는 안락한 기자실이 있다. 공항공사는 출입기자들을 정기적으로 해외출장에 데려가고, 가끔 (기자들이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도록) 광고도 내준다. 그리고 ‘세계 공항 서비스 평가 6년 연속 1위’ 같은 보도자료를 보낸다.

손 지회장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뭔가 얹힌 것 같았다. ‘가짜 갑’ 노릇에 빠져 지내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김영란법 시행이 이 거대한 불균형 구조에 조금이나마 균열을 가져올 수 있을까.

sha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서울 도심서 2년째 열린 시대착오적 ‘군사 퍼레이드’ [사설] 1.

서울 도심서 2년째 열린 시대착오적 ‘군사 퍼레이드’ [사설]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신영전 칼럼] 2.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신영전 칼럼]

[사설] ‘김건희 문제’ 해결 없이는 윤석열 정부 미래는 없다 3.

[사설] ‘김건희 문제’ 해결 없이는 윤석열 정부 미래는 없다

천장만 보는 사회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4.

천장만 보는 사회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사설] 이번엔 의대 휴학 승인 갈등, 감사 외에 정부 대책은 뭔가 5.

[사설] 이번엔 의대 휴학 승인 갈등, 감사 외에 정부 대책은 뭔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