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승
논설위원
비단 미르와 케이(K)스포츠재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설립 의도와 과정에서 두 재단이 가장 고약해서 그렇지, 박근혜 정부가 만든 ‘관제 재단’은 한둘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대기업들의 팔을 비틀어 설립됐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최근 작성한 ‘박근혜 정부의 권력형 재단 설립 및 모금 현황 자료’를 보면, 현 정부 들어 미르재단 등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6개 재단이 대기업으로부터 출연받은 금액이 2164억원에 이른다. 미르재단 486억원, 케이스포츠재단 288억원, 청년희망재단 880억원, 지능정보기술연구원 210억원, 중소상공인희망재단 100억원, 한국인터넷광고재단 200억원이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미르재단 입구.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정부는 “기업들의 자발적 기부”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턱도 없는 소리다. 이석수 청와대 특별감찰관실 감찰반원들이 지난 7월 미르와 케이스포츠재단에 돈을 낸 기업 임원들을 찾아가 ‘왜 출연을 했느냐’고 묻자 대답은 못 하고 먼 산만 바라보며 한숨을 쉬더라는 얘기는 관제 재단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노웅래 더민주 의원은 지난달 27일 국정감사에서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이 전경련에 얘기해, 전경련이 일괄적으로 기업들에 할당해서 모금한 거다”라는 대기업 고위관계자의 녹취록을 공개한 바 있다.
이렇게 강제로 거둔 돈으로 만들어놓은 재단들이 운영 또한 엉망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충분한 검토와 사전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만든 결과다. 설립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청년희망재단이 대표적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노사정 타협’ 이틀 뒤인 9월15일 국무회의에서 갑자기 청년희망펀드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개인 기부만 받고 기업으로부터는 돈을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돈이 모이지 않자 10월7일 황교안 국무총리가 기자회견을 열어 청년희망재단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자 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삼성은 이건희 회장과 임직원 이름으로 250억원, 현대차는 정몽구 회장과 임직원 이름으로 200억원을 기부했다. 다른 나머지 재벌들도 이런 식으로 돈을 냈다. 기업 돈이 아닌 기업인 개인의 돈이라는 모양새를 만든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꼼수를 부렸다.
청년희망재단은 올해 200억원의 예산을 들여 12만5천명의 청년에게 취업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고 6300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9월까지 재단을 통해 취업에 성공한 구직자는 800여명에 그친다. 이마저도 실적이 부풀려졌다는 지적을 받는다.
인공지능 연구를 위해 7월 설립된 지능정보기술연구원도 비슷하다. 3월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으로 인공지능 열풍이 불자 박 대통령이 인공지능 연구를 지시했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총대를 멨고, 삼성전자와 엘지전자 등 7개 기업으로부터 30억원씩 모두 210억원을 거뒀다.
이전 정부에서도 대기업들의 기부금 출연이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유독 심하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의 유산인 정경유착이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니냐는 걱정이 든다. 음습한 정경유착의 그늘 속에서 무슨 ‘기업가 정신’이 발휘되고 한국 경제의 앞날을 이끌어갈 ‘혁신 기업’이 나오겠는가. 꿈도 꾸지 말 일이다.
박 대통령은 틈만 나면 규제 개혁을 통해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강조한다. “규제는 암 덩어리”라며 “단두대에 올려 규제 혁명을 이루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진정으로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원한다면 먼저 ‘삥뜯기’부터 단두대로 보내 기업들을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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