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승
논설위원
박근혜 정부가 사실상 ‘식물정부’ 선고를 받았다. 국민에게 버림받고 있다. “이게 나라냐, 창피해 죽겠다”는 말이 이구동성으로 쏟아져 나온다. 27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선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했다. 박 대통령이 책임지는 방식으로는 ‘하야나 탄핵’ 의견이 42.3%로 가장 많았다. 대학가와 시민사회에선 시국선언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대통령이 책임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의 정신으로 국민이 심판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가 나온다.
공직사회도 동요하고 있다. 공무원들은 “헌정 사상 초유의 충격적 사건”이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정부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대통령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더는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어렵게 됐다고 우려한다. 이제 박근혜 정부에선 중요한 정책의 추진은 물 건너갔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27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게시판에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작금의 사태는 역대 정권의 레임덕과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이전 정권에선 대통령의 가족이나 측근이 비리를 저질렀고, 대통령이 나서서 수습했다. 그러나 이번엔 국가 시스템이 무너졌고, 대통령이 ‘몸통’이다. 게다가 대통령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게 온 세상에 공개됐다. 대통령의 자격을 잃어버린 것이다. 앞으로는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해도 국민의 동의를 얻기 어렵고 공직자들을 이끌어가기 힘들게 됐다.
경제가 점점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곳곳이 지뢰밭이다. 조선·해운업을 비롯한 부실기업 구조조정은 여전히 윤곽조차 그리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가계부채의 뇌관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강남 3구를 중심으로 달아오르고 있는 부동산시장은 또다시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들에 정부가 손도 못 대고 있는 상황에서, 대내외 여건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지난 3분기 경제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7%에 그쳤다. 2015년 4분기 이후 0%대 성장이 이어지고 있다. 연간으로 따지면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2%대 성장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성장의 질은 더 나쁘다. 부동산 과열에 따른 건설 투자와 추가경정예산을 통한 정부 소비를 제외하면 3분기 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떨어진다. 실제로 제조업은 -1.0%로 뒷걸음질을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1분기 이후 가장 낮다. 여기에 미국의 금리 인상이 임박했고 중국 경제의 성장세는 빠르게 둔화하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과 사드 배치 탓에 증폭된 지정학적 위험도 큰 짐이다. 내년에는 수출이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내수는 더 얼어붙어 경제가 올해보다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연간 성장률이 1%대로 추락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리더십이 확고한 정부도 헤쳐나가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민의 폭넓은 동의를 구해야 하고 여러 이해당사자 간의 첨예한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 범정부 차원에서 혼신을 다해 매달려도 될까 말까다. 최종적으로는 주무 부처가 청와대와 조율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 국민과 공직자 모두를 배신한 박근혜 정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남은 1년 4개월을 시간만 죽이면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가경제가 회복 불가능의 치명상을 입을 수 있고, 그 고통이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국민을 위해 마지막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조금이라도 속죄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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