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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말하는 누드모델 / 은유

등록 2016-10-28 19:14수정 2016-10-28 21:04

은유
작가

‘나는 해부학적으로 그려져 걸릴 것이다/ 훌륭한 박물관에. 부르주아들이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겠지/ 이런 강변의 매춘부 이미지에 대고. 그들은 그걸 예술이라 하지.’

영국 시인 캐럴 앤 더피의 <서 있는 여성 누드> 일부다. 시의 화자는 누드모델. 자신에게서 ‘색을 뽑’고 움직임을 통제하며 권력 감정을 느끼는 화가를 ‘조그마한 남자’(little man)로 부르고, 누드화에 감탄하는 영국 여왕을 ‘웃긴다’고 말한다. 이 시에서 여성은 그려지고 보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다. 자신을 보는 화가-관객을 보는 시선의 전도로 인해 역사상 목소리를 가진 적 없는 누드모델이 견자(見者)로 등장한다.

친구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이탈리아에서 미술관엘 갔는데 길게 늘어선 줄이 거의 여성이더란다. 전시실엔 백인 남성 화가 작품들만 걸려 있음은 물론이다. 관람을 마치고 바닷가에 갔더니 미술관에서 안 보이던 남자들이 해변에 누워 여자들을 감상하고 있더라나. 왜 여자는 보여지고 (그걸 또 돈 내고 보고) 남자는 창작하게 된 거냐고 푸념했다.

그런데 위의 시에 따르면 화폭 속 여자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가만히 있지만은 않는다. 자신을 보는 사람들을 관찰해 통찰을 얻는다. 그는 ‘해야만 하니까. 다른 선택이 없으니까.’ 그저 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화가나 자신이나 같은 처지라며 이런 시구를 남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인간사를 아우르는 간명한 명제다. 난 일전에 한 남성 철학자의 책을 읽었는데 서문에는 이 방대한 저서를 집필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걸렸고 몸이 어떻게 탈진됐는지 병명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 비슷한 시기에 빵집 아줌마 얘기를 들었다. 김밥집에서 수년간 일한 그는 김밥을 하도 말아 손목 관절이 손상돼 그만두고 시장통 빵집에 겨우 취직했다. 빵 담고 거스름돈 내주는 일이 망가진 손목으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동작인 탓이다.

어떤 직업은 노동의 결과물이 보존되고 과정의 수고로움이 기록된다. 존경과 동경을 받는다. 어떤 직업은 아니다. 노동의 성과가 사라지고 고충이 음소거된다. 폄하와 무시를 당한다. 사회적 무지와 몰이해. 그것이 직업의 귀천을 만들고 구조적 불평등을 낳는 건 아닐까. 대부분의 직업이, 몸이 축난다는 점에서 단순직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전문직이다. 저 ‘누드모델’이 응시하듯 누군가를 깊게 들여다본 적 없는 우리는, 서로를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내 직업 작가도 학자와 더불어 문(文)을 숭상하는 한국 사회 유교적 전통의 수혜 직군이다. 가난해도 대접받는 편이다. 그런데 글 쓰는 직업에도 위계가 있다. 자유기고가와 르포르타주 작가로 일하는 내게 사람들은 예사롭게 묻는다. “시나 소설은 안 쓰세요?” “등단하셔야죠.” 저 순문학 세계에 이르는 길 어디쯤에 비소설 분야 문필하청업자 자리가 있지 싶다.

장르는 갈래다. 장르 자체가 작품의 고귀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직업이 인격을 담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권력에 빌붙어 합리적 생존성만 따지는 의사나 법조인이 있고, 약자에게 다정한 (성)폭력을 휘두르는 문인과 교수가 있다. 특정 직업에 덧씌워진 환상을 벗겨내고, 그 일이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다른 존재를 억압하진 않는지, 어떤 관점을 내포하는지 ‘해부학적으로’ 따져야 한다. ‘나는 볼 수 있다’고 말하는 누드모델처럼, 보여질 때조차도 보는 사람이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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