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요즘 온 국민이 손에 땀을 쥐고 시청하는 막장 드라마는 어느 장르에 해당할까. 기업을 협박하고 을러 돈을 갈취하는 장면을 보면 조폭 영화인 듯도 싶고, 비선 실세와 고위공직자들이 얽히고설켜서 저지른 국정 농단에 주목하면 정치 스릴러 같기도 한데, 그런 설명으로는 뭔가 모자란다. 드라마 전체를 감싸고 도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현실적 상상을 뛰어넘는 괴기스러운 스토리 전개가 ‘괴담과 기담’류에 가깝다. 전근대적 서사에 뿌리를 둔 샤머니즘적 신념 체계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일종의 ‘오컬트 무비’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 괴담·기담의 정점에는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세간에는 박 대통령이 그날 고 최태민씨의 천도재를 지냈다는 따위의 이야기도 무성하다. 꽃다운 젊은 목숨들이 깊은 바다에 수장되는 그 순간에 20년 전에 죽은 망자를 위한 진혼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국회에서 답변했지만, 최순실씨 관련 모든 의혹을 “봉건시대” 운운하며 잡아뗐던 이 정권의 행태를 생각하면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박 대통령이 그 시간에 수면 상태에서 피부과 시술을 받았다는 의혹도 나돈다. 도대체 그날 그 시간에 박 대통령은 ‘무슨 짓’을 하고 있었길래 그처럼 꽁꽁 싸매고 끙끙대고 있는가. 7시간 미스터리는 단순한 엽기적 호기심이나 관음증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최순실 게이트는 끼리끼리 짜고 권력을 탐하고 돈을 해처먹은 사건이다. 관대하게 말하자면 특정 개인들의 ‘탐욕과 일탈’의 문제다. 그러나 7시간 미스터리는 국민에게 피눈물을 안기고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더 중대한 사안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의 온당한 슬픔과 분노를 ‘불순한 정치적 기도’로 깎아내리고 나라를 분열과 퇴행의 늪에 빠뜨린 것도 근본적으로 7시간 미스터리와 맞닿아 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서도 7시간 비밀의 폐해가 묻어난다. 선거 때 야당 정치인들을 지지했다는 이유뿐 아니라 세월호 시국선언이나 세월호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 서명했다는 이유만으로 살생부에 올렸다. 국민을 내 편 네 편으로 갈라 반대편을 박해하고 탄압하는 중세 암흑시대로 돌아간 저변에 7시간 미스터리가 놓여 있다. 최순실씨 연관 여부와 관계없이 이제는 진상을 명백히 밝혀야 할 이유다.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명확히 확인된 사실은 우리가 힘들게 쌓아온 근대 민주국가가 실제로는 모래 위에 쌓은 성이었다는 점이다. 근대를 상징하는 합리와 이성 대신 불합리와 맹목이 횡행하는 사회가 우리의 현주소였다. 그런 불합리와 맹목이 국민을 탄압하고, ‘통일 대박’ 따위의 구호로 대북 정책을 왜곡하고, 나라를 혼돈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미르·케이 재단 비리나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문제를 떠나 여전히 우리 사회를 떠도는 전근대의 망령을 축출하는 과제가 절실함을 이 사건은 웅변한다. 드라마의 시작은 괴담·기담이었지만 결말은 합리와 이성으로 막을 내려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과연 이 드라마는 그런 결말로 이어질까. 쉽지 않아 보인다. ‘주술에 걸려 혼을 잃었던 여왕은 다시 혼을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국정을 보살펴 나라가 번성하고 백성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지금 청와대가 꿈꾸는 시나리오가 아닐까. 박 대통령이 “흔들림 없는 국정운영”을 강조하고, 최순실씨가 서둘러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고, 청와대가 참모진을 교체하면서 정작 중요한 비서실장 후임자는 놓아두고 검찰 장악용 민정수석과 대국민 이미지 제고용 홍보수석만 임명한 것에서도 그런 시나리오가 읽힌다. 사건을 최씨 개인 비리로 몰아가는 한편으로 대대적인 인적 쇄신 이벤트와 “외롭고 슬픈 대통령”(김재원 전 정무수석) 따위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벌이면 드라마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시나리오의 골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드라마의 장르를 ‘좀비 스릴러’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박 대통령은 이미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았다. 박 대통령만이 아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를 비롯해 국가 시스템을 조롱하고 무력화하는 데 박수부대 노릇을 한 사람들은 이미 정치적 명운을 다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여긴다. 그것이 바로 좀비의 특성이다. 좀비 대통령, 좀비 여당, 좀비 친박이 여전히 주연 배우로 등장하는 드라마는 더 무섭고 오싹한 공포물이다.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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