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백수광부의 아내, 주몽, 직녀, 선덕여왕, 장보고, 문익점, 정도전, 세종대왕, 장영실, 황진이, 신사임당, 이순신, 광해군, 홍길동의 어머니, 임꺽정, 혜경궁 홍씨, 명성황후, 전봉준, 이완용, 유관순, 나혜석, 김구, 손기정, 김두한, 프란체스카 도너, 성철 스님, 김영한(자야), 전태일, 박경리, 조용필, 설현, 그대, 그리고 나. 이들 모두가 함께 살기에 ‘최선인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미국의 정치철학자 로버트 노직은 1984년 출간한 <국가, 아나키, 유토피아>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모든 사람들이 살기에 최적인 ‘하나의 사회’가 있다는 견해는 나에게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그의 결론에 딴죽을 걸고 싶지 않다. 유토피아는 없다. 그러나 그가 덫을 놓고 던진 질문에도 공감하지 않는다. 미국 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은 “사회엔 20년에 한 번씩 혁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모든 사회계약은 유통기한이 있으며, 새 세대는 기존 계약의 구속을 벗어나 새로운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공화국은 최선의 사회가 아니다. 주권자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지 계약을 갱신할 수 있게 열린 사회다. 민주공화국은 계약을 바꾸는 의사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구성원 모두에게 똑같이 부여한다. 물론 사람마다 의사 결정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크기가 천양지차이긴 하지만 말이다. 최근 몇 주간 우리는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모였다. 대통령이 사회계약의 핵심인 헌법을 위배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국회는 촛불 민심을 받아들여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그러나 이는 혁명은 아니다. 촛불은 대통령과 주변 권력자들의 ‘법치’ 파괴를, 그로 인한 민주공화정의 파괴를 절벽 끝에서 저지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위대한 것임엔 틀림없으나, 대통령이 물러나는 것만으로 많은 이들이 겪는 ‘고단함과 억울함과 불안함’(이는 고 김기원 교수의 표현이다)이 바로 사라질 리는 없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촛불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나는 먼저 ‘언론’을 가리키고 싶다. 공론장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 한 촛불은 언제 배반당할지 모른다. 제퍼슨은 ‘언론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언론’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면 ‘정부 없는 언론’을 택하겠다고 했다. 그보다 앞서 율곡 이이는 ‘인심이 함께 옳다 하는 공론’에 따라 정치가 행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새로운 사회계약을 논하기 어려운 오늘날, 제구실을 하는 언론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지금 깜깜한 어둠 속에 갇혀 있다. 4년 전 대통령 선거에서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를 보여준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