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올해 내 인생 사건은 군인 엄마가 된 것이다. 지난봄 아들이 군에 간 뒤 앎과 감각이 바뀌었다. 군 의문사에 관심이 가고 참사·재난 기록문학이 다시 읽힌다. 대북 관련 뉴스가 귀에 박히고 뿔테 안경 쓴 앳된 군인이 자꾸 보인다. 거리에 군인이 이렇게 많았나 새삼스럽다. 민간인 청년들이 재잘거리며 노는 모습이 예쁘다가도 10㎏짜리 군장 들고 행군 중인 아들 얼굴이, 부르튼 손이 겹쳐 울컥한다. 이런 심정을 토로하면 주변에서 위로한다. 국방부의 시계도 돌아간다고. 아들 입대 4일 후, 구의역 참사가 발생했다.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 사이에 끼여 숨진 청년노동자의 처참한 죽음에, 사고의 원인을 고인 과실로 몰아가려던 원·하청 업체의 비겁한 처사에, 고인의 가방에 나뒹굴던 사발면과 쇠수저에 국민적 분노와 슬픔이 컸던 사건이다. 고인이 아들 또래다. 내겐 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 것 같은 뉴스였다. 당시 고인 엄마가 쓴 호소문을 며칠 전 다시 읽었는데 이 대목에서 멈칫했다. “20년을 키운 어미가 그 아들을 알아볼 수 없다. 저 처참한 모습이 우리 아들이 아니다. (…) 사흘 못 봤는데 너무 보고 싶다. 군대 가거나 유학 갔다고 생각하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몇 년 참을 수 있지만, 군대 가면 휴가라도 나오고 유학 가면 영상통화로 볼 수가 있다. 저는 평생 아이를 볼 수가 없다.” 자식의 군 입대를 ‘가정’하고 부재의 고통을 견뎌보고자 하는 엄마. 죽은 자식을 둔 엄마의 절규와 몸부림이 끊이질 않는 나라에서 내 자식의 무사귀환을 바라고 있자니 어쩐지 죄스럽고 마음이 복잡했다. 자식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나라. 군대 안보다 밖이 안전할까. 신병훈련소 과정을 마친 아들은 얼마나 힘들었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아르바이트할 때보다 어떤 면에서 편했다고. 음식점 알바가 밤 12시에 끝나서 늘 잠이 모자랐고 근무 중 손님이 몰아치면 끼니를 놓치기 일쑤였다고, 군대는 식사와 취침이 규칙적이라 좋더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군 입대가 적체였나 싶었다. 먹고 자는 삶의 생태계마저 무너진 사회에서 의식주가 보장되는 군대가 젊은이들의 대안적 거처이자 일시적 도피처가 되는 현실은 얼마나 서글픈가. 국방부의 시계가 멈춰도 일상의 시계는 돌아간다. 또 누군가의 시계는 갑자기 정지한다. 오토바이 배달에 나선 청소년 노동자가, 에어컨 실외기 설치 기사가, 스마트폰 만드는 반도체 노동자가 어느 날 질병을 얻고 목숨을 잃는다. 마르크스가 일찍이 간파했듯이 “자본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1노동일 내에 운동시킬 수 있는 노동력의 최대한도일 뿐”인 야만스런 현실에서 노동에 대면하자마자 인간은 사라져버린다. 구의역에서 청년노동자가 스러졌듯이. 계절이 두 번 바뀌고서야 구의역 참사 현장에 가보았다. 노란 포스트잇 흐드러졌던 승강장은 꽃잎이 진 잿빛 풍경이다. 고인이 ‘끼인’ 9-4 승강장을 시간에 ‘쫓긴’ 이들이 오늘도 바삐 통과한다. 일할수록 닦달당하고 마모되면서 가난해지는데 너도 가고 나도 간다. 아들도 가고 엄마도 간다. 때가 되면 군인 엄마의 옷은 벗어도 재난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불안의 옷은 벗지 못할 것임을 나는 안다. 참사 현장 스크린도어에 비문(碑文)처럼 새겨진 ‘너는 나다’라는 문구를 헤아려본다. 내가 입은 군인 엄마의 옷은 유가족 엄마가 그토록 입고 싶어 했던 옷이고, 유가족 엄마가 입은 슬픔의 옷은 어느 날 내게 입혀질 수도 있는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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