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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세현 칼럼] 대통령의 외교안보 철학과 소신

등록 2016-12-25 17:08수정 2016-12-25 20:22

트럼프식 대외정책이 전개되면서 국제정세가 요동치는 와중에 우리의 국가이익을 침해받을 수도 있고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이익을 위해서라면 젖 먹던 힘까지 짜냈던 김대중 대통령 정도의 철학과 소신과 뚝심을 가진 대권 주자가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정세현
평화협력원 이사장·전 통일부 장관

내년 1월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출범한다. 외교안보 분야 각료 지명자들 면면은 트럼프의 정책이 강성으로 나갈 것임을 시사한다. 지난 2일, 트럼프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깨고 대만 총통과 통화함으로써 중국의 역린을 건드렸다. 22일, 푸틴이 핵능력 강화를 선언하자 트럼프도 즉각 핵능력 강화를 선언했다. 미·중·러 간 갈등과 이합집산이 복잡하게 전개될 것이고 그 여파가 한반도에까지 밀려올 것이다.

때문에 내년 선출될 한국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밀려오는 외교안보의 격랑 속에서 ‘한국호’가 난파되지 않도록 사투를 벌여야 할 것 같다. 대통령이 직접 일선에서 뛰어야 할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상외교에서는 참모들이 써준 것만 읽어서는 국가이익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 대통령 본인의 확고한 철학과 소신으로 상대방을 설득하고야 말겠다는 뚝심이 필요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대통령의 철학과 소신과 뚝심이 아니었더라면 전쟁에 휘말릴 뻔했던 일화를 소개한다.

2002년 1월29일(미국시각), 부시 미 대통령이 ‘의회연설’에서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2001년 9·11 테러가 알카에다의 소행이었기 때문에 그 배후로 추정되는 국가들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 악의 축에 포함된 것은 좀 의외였다. 그때는 북핵 문제도 미사일 문제도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바로 그날 오전(한국시각) 통일부 장관 발령을 받았는데 불과 12시간 만에 미국의 대북정책이 초강경으로 돌아설 것임을 통보받은 셈이다.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는 미국이 그들의 필요 때문에 대북 군사조치를 취하면, 그것은 곧 한반도 전쟁이다. 그렇게 되면 6·15 남북정상회담 후 순항하던 남북관계는 올스톱되고 경제는 파탄 날 수밖에 없다. 부시의 ‘악의 축’ 연설은 악재 중의 악재였다.

그런데 20여일 후인 2월2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김대중-부시 정상회담 후에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날 오후 한·미 정상이 도라산역 홀에서 합동연설을 하게 돼 있었는데, 부시가 먼저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권고에 따라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 북한과 대화하겠다. 대북 인도적 지원도 하겠다”고 한 것이다. 뜻밖이었다. “도대체 오전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변했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답이 서울로 돌아오는 대통령 전용열차 안에서 나왔다. 김대중 대통령이 “아까 부시 대통령 연설 들었지요? 내가 오늘 오전 100분 동안 젖 먹던 힘까지 짜내가면서 부시를 설득했소. 그렇게 해서 일단 전쟁은 막아놨으니 나머지는 통일부 장관이 잘 풀어 나가시오”라고 말씀하셨다.

대통령 외교안보비서관, 통일부 차관·장관으로서 역대 대통령들을 비교적 가까이서 지켜본 필자는, 악의 축 연설을 계기로 분단국인 한국의 대통령이 갖춰야 할 식견과 자질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 미국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는 한국. 그 대통령이 자국중심성이 분명한 외교안보 철학과 소신이 없으면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고, 장차 국가이익이 침해당할 걸 뻔히 알면서도 감히 ‘노(NO)!’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 감각조차 없는 대통령을 최근 3~4년 동안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대통령은 자국중심의 투철한 철학과 소신에 입각해서 상대와 끝장토론을 해서라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려는 결기와 뚝심이 있어야 한다.

곧 치러질 대선을 앞두고 대권 주자들이 여러 가지 얘기들을 한다. 그런데 그들 중에 자국중심성이 분명한 외교안보 철학과 소신으로 국가이익을 위해 끝장토론도 마다하지 않을 뚝심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경제나 개헌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좀 있지만 외교안보 철학과 소신을 밝히는 사람은 잘 안 보인다. 이건 대권 주자 대부분이 외교안보 상황이 악화되면 국내경제도 악화되어 경제민주화도 복지증대도 못하게 된다는 원리를 아직 잘 모른다는 얘기다. “남북관계가 곧 경제이고 안보”인데도 말이다.

트럼프식 대외정책이 전개되면서 국제정세가 요동치는 와중에 우리의 국가이익을 침해받을 수도 있고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이익을 위해서라면 젖 먹던 힘까지 짜냈던 김대중 대통령 정도의 철학과 소신과 뚝심을 가진 대권 주자가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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