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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일본에서 온 변호사 / 이춘재

등록 2017-01-17 18:29수정 2017-01-17 19:03

이춘재
법조팀장

지난 14일 전남 고흥 녹동항 앞바다의 소록도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이곳 주민들을 비롯한 한센병 환자 590명을 대리해 한국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인 한센인권변호단 소속 변호사들이었다. 박영립 단장을 비롯한 10여명의 변호사들은 지난 2004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금 청구소송을 낸 것을 시작으로 13년 동안 소록도 주민들과 동고동락했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지난해 5월 일본 정부가 590명에 대한 보상금 지급을 최종 확정했고, 한국은 재판에서 1, 2심 모두 승소한 뒤 대법원 판결을 남겨두고 있다. 이날은 지난 13년간의 지루한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한 것을 자축하는 날이었다.

주민들에게 반가운 손님은 또 있었다. 한센인 소송을 처음 제안한 일본 변호사들이다. 그중 칠순을 훌쩍 넘긴 도쿠다 야스유키 변호사의 방문은 주민들은 물론 한국 변호사들에게도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그는 2002년 일본 정부의 과거 한센인 인권 유린 정책을 보상하는 법이 제정되자, 2003년 한국의 한센인 봉사단체를 통해 한국 변호사들에게 연락했다.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소록도 주민들에 대한 강제격리와 낙태, 단종 정책의 피해 보상을 일본 정부에 청구하는 소송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도쿠다 변호사는 그해 2월 일본 변호사들을 이끌고 소록도를 방문했다. 원고가 될 주민들을 만나 직접 진술서를 받는 그의 모습에 한국 변호사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말도 안 통하는데도 굳이 한국에 와서 직접 진술을 받겠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의뢰인이 진술하는 모습을 직접 봐야 법정에서 제대로 변론할 수 있다’고 하더라. 진술을 서면으로 대신하는 관행에 젖어 있던 우리와 달라 많이 반성했다.” 당시 도쿠다 변호사와 함께 소송을 준비했던 민경한 변호사의 말이다. “한센병에 대한 오해가 여전히 남아 있는 때였는데도 도쿠다씨는 직접 주민들 집을 방문해 진술을 받았다. 주민들이 차려 준 소박한 밥상에서 함께 밥을 맛있게 먹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2004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은 이듬해 패소했지만, 일본 변호사들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2006년 일본 정부가 관련법을 개정했고, 그해 3월 소록도 주민 2명에 대한 첫 보상 결정이 내려졌다. 도쿠다씨를 비롯한 일본 변호사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도쿠다 변호사는 이날 저녁 한국 변호사들이 마련한 뒤풀이 자리에서 그동안 미처 말하지 못했던 ‘과거’를 털어놨다. “내 아버지는 태평양전쟁 당시 군인으로 참전해 전사했다. 나는 전쟁 피해자다. 하지만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그곳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줬기 때문이다.” 도쿠다 변호사는 “가해자가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아 준 소록도 주민들에게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한국 변호사들의 코끝이 찡해졌다. 저녁을 마친 뒤 그는 박영립 단장에게 조심스레 부탁했다. “혹시 13년 전 제가 만났던 의뢰인이 살아 계시면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늦은 밤 소록도로 되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인권 변호사의 참모습이 느껴졌다. 인권은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사실을 그는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17일 그와 비슷한 연배의 법조인 김기춘씨가 특검에 소환됐다. 김씨는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을 탄압하기 위한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의 소환 장면을 보며 문득 도쿠다 변호사가 그리워졌다.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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