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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나, 다니엘 블레이크 따라하기 / 은유

등록 2017-01-20 17:43수정 2017-01-20 21:01

은유
작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두 번 봤다. 켄 로치의 마스터피스로 꼽히는 만큼 훌륭함으로 꽉 찬 영화지만 난 등장인물들이 같이 다니는 장면에 눈길이 갔다. 주인공 다니엘은 40년 경력의 늙은 목수, 케이티는 아이 둘을 키우는 한 부모 가장이다. 둘 다 관료화된 복지제도의 희생양으로 관공서에서 우연히 조우했다. 처음 만나서부터 허름한 집에 따라가고 소소한 도움을 주고받다가 무료 식료품 보급소나 질병수당 항고심이 이뤄지는 법원 등 비참함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운명의 극장’까지 동반 입장한다.

그냥 같이 따라가는 것. 혹은 가 ‘주는’ 것. 간다는 행위의 조건 없는 증여. 딱히 임무가 없었지만 가면 할 일이 생기기도 하는 것. 어찌할 도리는 없으나 그냥 옆에 앉아 있는 것. 이 무위의 동행은 일상을 분 단위로 쪼개 생산성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가장 어려운 과업인지 모른다. 시간 낭비이자 간섭으로 간주된다. 영화는 다르다. 목적도 거래도 없이 사람과 사람이 그냥 같이 있음으로써 일어나는 일은 가히 혁명적이다. 사람을 도구화하고 인격을 뭉개버리는 사회 제도에 맞서 그들은 존엄을 지켜주고 대변하는 삶의 증인이 된다.

영화에서 본 대로 ‘그냥 같이 가기’를 언제 한번 흉내 내고 싶었는데 그 행위 모방의 기회는 새해 벽두부터 찾아왔다.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친구가 출판도매상 송인서적 부도로 피해를 입었다. 타격이 크다. 정유라 말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돈이지만 책 한 권 낼 돈은 넘는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려고 집필 노동을 할 때, 친구는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려고 편집 알바를 했다. 그 돈을 고스란히 날렸다. 며칠 뒤 국회에서 대책 마련 간담회가 열렸다. 출판인들이 많이 참석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채권단이 된 처지가 처량해 가기 싫다는 친구를 나는 짐짓 심상하게 따라나섰다.

국회 간담회장엔 출판계 실상을 고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출판계는 아직도 어음이 거래되고 그나마 문방구 종이어음이 사라진 게 불과 1년 전이라는 것. 책을 낸다는 이유로 최하위 신용등급을 받고 있다는 어느 출판사 대표의 증언. 출판업이 사양산업이라며 투자를 기피하고 게임이나 엔터테인먼트 산업만 육성했다는 질책. 무속신앙에 관한 책 안 팔리는 거 알지만 기록을 위해 만들었다고, 출판계가 무너지면 전통, 문화, 미래가 사라진다고, 대출금리 1%, 2% 논할 때가 아니라고 목청을 높이던 한 출판인은 복받치듯 외쳤다.

“우리가 거지입니까!”

옆자리 친구가 울컥 고개를 떨궜다. 건너편 한 출판사 대표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평생 목수로 일한 다니엘이 이리저리 떠밀리다 벼랑 끝까지 다다른 삶의 자리에서 ‘나는 거지도 게으름뱅이도 아니다’ 선언하듯이 책 만들기 외길을 걸어온 그들도 우리는 거지도 장사꾼도 아님을 목 아프게 이야기하고 있다. 당장에 무너지는 출판사를 붙들어 놓고 낙후된 출판유통 시스템을 바꾸는 구조적 대책을 세우길 요구했다.

가난한 출판인들 생살여탈권이 논의되는 운명의 극장을 돌아나오며 또 한 편의 영화를 본 기분이 들었다. 제목은 ‘나, 출판쟁이’. 최소한의 직업적 자부심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일하는 사람을 종이컵처럼 쓰고 버리는 게 당연한 체제에서, 허기와 모욕에 꺾이지 않고 존엄을 지키려면 더 많이 선언하고 더 그냥 같이 다녀야 할 것 같다.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넌 엄마-출판인으로 잘 버텼어”라는 영화 속 명대사까지 외워서 건네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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