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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소녀상과 기억투쟁 / 고명섭

등록 2017-01-24 18:11수정 2017-01-24 19:28

고명섭
논설위원

‘시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시간 현상을 ‘현재’를 기점으로 삼아 숙고했다. 시간이란 끊임없이 흐르는 현재의 연속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사라진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20세기에 마르틴 하이데거에게서 나왔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을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보았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현재의 연속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단순히 현재만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미리 달려가는 존재이며 동시에 과거를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하는 존재다. 인간은 ‘다가올 미래’와 ‘지나간 과거’를 함께 품음으로써 현재를 산다. 그러므로 미래는 다가올 시간으로서 현재 안에 있고, 과거는 간직된 시간으로서 마찬가지로 현재 안에 있다. 현재 안에 미래와 과거가, 다가올 것과 지나간 것이 함께 속해 있다.

하이데거의 이런 시간 이해는 과거를 기억하려는 우리의 투쟁에 암시를 준다. 미래를 열어 밝히고자 한다면 우리는 과거를 그저 흘려보내거나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잊지 않으려고 세운 소녀상이 과거를 현재로 끌어당겨 미래를 열어가려는 집단적 기억투쟁의 모범을 보여준다. 소녀상을 세우고 지키는 것은 소녀상이 상징하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반인륜 범죄를 망각 속에 묻지 않겠다는 집단적 결의다. 소녀상은 과거가 표류하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닻이며 기억이 유실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둑이다.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정부의 12·28 합의는 일제의 전쟁범죄를 역사의 뒷길로 치워버리자는 망각의 담합이었다. 이 합의를 주도한 세력, 그러니까 일본의 극우세력과 한국의 수구세력, 그리고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패권주의 세력은 12·28 합의로 과거를 봉인함으로써 세 나라에 모두 득이 되는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고 합창했다. 그러나 과거를 바르게 기억하지 않는 한 미래는 바르게 열릴 수 없다.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에 새겨진 괴로움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고통을 기억하고 가해자의 과오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 괴로움을 잊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고통과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는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1월18일 부산 대학생겨레하나 회원들이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에서 소녀상 지킴이 발대식을 하고 있다. 부산/연합뉴스
1월18일 부산 대학생겨레하나 회원들이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에서 소녀상 지킴이 발대식을 하고 있다. 부산/연합뉴스
그러므로 소녀상을 세우는 것은 한국을 위하는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에게 과거의 고통을 잊지 않게 해주는 소녀상이 일본에는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진주만의 가미카제 대원 기념비에 헌화하기 전에 한국의 소녀상을 찾아 참회했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에 분개해 대사를 불러들이고 고강도 보복을 선언했다. 이런 과격한 행동은 반인륜 범죄를 외면하려고 몸부림치는 당사자의 윤리적 취약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회피와 부인의 방어기제는 양심의 단단함이 아니라 허약함을 증언한다. 양심이 죄의식에 차 있으니 얌전히 앉은 소녀상 앞에서 비수에라도 찔린 듯이 질겁하는 것이다. 일본이 나치 만행을 사죄하는 독일처럼 전쟁범죄의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소녀상이 자기성찰의 거울이 될지언정 눈엣가시 같은 흉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내일을 기약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평화와 우애의 미래는 과거를 간직해 오늘의 일로 새기는 데서 열린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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