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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도깨비와 실장님 / 김용진

등록 2017-02-10 18:20수정 2017-02-10 20:36

피터 김용진
월간 <싱클레어> 편집장, 뮤지션

또 한 편의 드라마가 끝났다. 시청률 15%면 성공이라고 하는 게 요즘의 현실이지만 체감하는 인기란 그 이상이다. 곳곳에서 드라마의 음악이 들린다. 길에서.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단순한 일렉기타 소리이지만 인상적인 그 멜로디가 들린다. 조금 지나면 또 새로운 드라마가 나타나 대체되겠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도깨비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하고, 어떤 개그맨은 가슴에 칼을 꽂고 등장한다. 케이블티브이에서는 곳곳에서 재방송을 시작했다.

역대 드라마 순위를 찾아보면 30위까지가 대부분 50%의 시청률을 넘는다. 시대가 바뀌기는 했다. 1위는 1996년에 방송된 ‘첫사랑’인데 66%를 육박한다. 과연 90년대는 어떤 부흥기였는지 모르겠다.

순위 안의 드라마를 쭉 훑어보면, 주로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소소하게 이어진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결국 비슷한 사건들이 반복되는 이야기였다면, 21세기 드라마들은 다양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생산되는 듯하다. 그래도 변함없이 주인공은 알고 보면 재벌 2세, 회사에서는 실장님부터 시작한다. 실장님은 자본주의 시대의 자유패스인 한도를 알 수 없는 신용카드로 판타지를 현실로 만들어준다. 중국 관광객처럼 이쪽에서 저쪽까지 쭉 주세요라고 하기도 하고, 영화에서나 보던 리조트에서 휴가 기간도 아닌데 머물기도 하고, 어떻게 알았는지 직장은 어떻게 했는지 필요할 때 짠 하고 나타난다. 할 일은 없는지 대낮부터 잘 기다린다.

그러다 ‘참으로 퍽 난감하게’ 도깨비가 나타났다.

그는 문만 열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부르기도 편하다. 불만 후 불어 끄면 된다. 게다가 죽지도 않는다. 가슴에 꽂힌 칼만 건드리지 않으면.

세상에는 아무리 ‘실장님’이라도 바꿀 수 없는 물리법칙이라는 게 있다. 캐나다의 멋진 풍경을 보려면 비행기를 타야 하고(물론 실장님은 최소 비즈니스석에 탈 것이고, 거기서 좀 더 넓은 자리에서 더 좋은 화면으로 영화를 보며 더 좋은 기내식으로 정중한 서비스를 받겠지만) 비행기를 타고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 14시간을 꼬박 비행기에서 보내고 세관도 통과해야 한다. 여주인공이 필요로 할 때 짠 하고 나타나기는 하지만 회사를 조퇴하거나 택시를 타거나 비서에게 일정 취소해줘요라고 한마디 남기며 좋은 차를 타고 달려가야 하는데, 아마도 최소 30분은 줘야 한다. 기다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실장님도 인간인지라 몇날이나 몇년을 기다리는 것쯤은 할 수 있겠지만 다음 생으로 환생하기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도깨비의 등장을 보면서 우리의 바람이라는 것을 본다. 나의 바람의 변화를 본다. 좀 더 쉽게 확실히 이뤄지면 좋겠다는 바람. 물리법칙쯤은 건너뛸 수 있는 즉각적인 실현 말이다.

모든 날이 좋기를 바란다. 때때로 좋고 때때로 좋지 않은 일상을 생각하기보다는, 진짜 물리학의 세계보다는 ‘사랑의 물리학’의 세계를 바라본다. 이제 실장님은 가고 도깨비여 와라라고 말하고 있다.

저기 월성 핵발전소, 도깨비가 나타나서 확 없애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 ‘월성 1호기 수명연장 취소 판결’에서 승소한 이야기를 들으니 역시 판타지가 아닌 현실에서 꾸역꾸역 물리법칙과 싸우며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니 탄핵도 도깨비에게 맡기지 말고 우리가 하자. 최소한 실장님 버전으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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